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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기울기(Inclination)로 만들진 메타버스(Metaverse)

 

 

 

어딘지 이상한 그림들이다. <넘어진 사람>(2020), <식당>(2020), <밥 먹기 싫은 아이>(2021), <휴게실>(2021), <눈치>(2021> ..., 삶과 밀착된 제목들을 본다. 그러나 작가 박다솜의 작업들 중에 일상의 소소함에서 건져 올린 소재나 제목에 걸 맞는 친절한 묘사나 찰떡같은 재현의 이미지는 없다. 제목과 이미지의 합일을 꿈꿔 보지만 잘 실현되지 않는다. 만일 제목이 가려진 채로 관람자가 단지 이미지만으로 퍼즐링을 한다면 작가가 부여한 제목들을 향해 곧장 달려갈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해 보인다. 무제(Untitled)로 처리되는 작품들이 허다한 세상, 사실적으로 재현된 이미지를 바라는 것이 촌스러운 기대가 되어 버린 지도 오래, 이미지가 텍스트에 종속 될 이유도 없고 작가 박다솜의 작업이 시나 소설에 대한 삽화도 아니며, 하물며 우리가 1차원적인 묘사나 도식화 된 그림을 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닌 마당에, 대체 저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무엇인가를 남발하게 만드는 그림들이 왜 한층 더, 더 낯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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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곳_종이에 유화_151x138cm_2020 

 

  

세련된 색감과 대담한 구성은 충분히 감각적인 쾌(快)를 주지만, 정교한 묘사나 특별한 소재들이 선사하는 볼거리, 수사학적 기교나 미술사적 맥락이 주는 읽을거리는 모두 공백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삶의 미시적 부분들이 담긴 소소한 일기장도 아닌 어느 한 오타쿠의 일기장 같은 이 그림들은 왜 시선을 붙잡아 놓는 것일까? 박다솜 화면 속의 생략되고 변형된 이미지들은 뜨거운 표현적 제스추어라기보다 되려 차가워 보인다. 차가움과 덤덤함을 견지한 작품들의 분위기는 표현적 내용이나 추상적 형식 그 어느 쪽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묘한 긴장감을 준다. 한편, 미지의 한 세계로 뿌리를 뻗은 듯 한 형태들은 불가항력적이고 필연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존재할 때 나올법한 넘치는 대범함과 그로 인한 기묘한 아우라마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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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일어난 새_판넬에 유화_116.5x80.3cm_2021

 

 

박다솜의 이미지들 속에서 인간과의 유사성을 발견하려는 의지를 지연(遲延)시켜 본다면, 일부분이 잘려나간 형태, 본체에서 분리 돼 공중에 떠있는 파편, 툭 치면 쉽게 떨어져 나갈 듯 느슨한 임의적 결합방식과 혼돈(Chaos) 등이 눈에 띌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화면 전체의 ‘공간운영’이다. <춤>(2017), <모퉁이에서>(2017)와 같은 초기작들에서도 관람자의 시선을 붙잡아 놓았던 일관된 포인트는 세련된 색감과 감각적 붓질, 그리고 무엇보다 시점(Viewpoint)이었다. 시점의 변화는 2차원 평면 회화에서 해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바닥면을 곧추 세워 입면으로 표현하거나 한 화면 속의 공간과 오브제 각각의 시점을 뒤섞어 버리는 공간차원(Spacial Dimension)의 변주. 자유롭고 동시에 혼란스러운 다차원적(Multi-dimensional) 혼합은, 꿈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루던 초기작들이 부감(俯瞰)으로 처리되었던 것과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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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_종이에 유화_151x188cm_2020

 

 

보편적 삶의 소박한 일기장, 또는 형식적 실험, 그 무엇도 목적이 될 수 없는 박다솜의 작업 세계. 베일에 가려진 그림 속 이미지들은, 생략, 임의적인 결합, 대범한 표현과 배치, 허공에의 부유 등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규칙성, 밀도, 견고함의 질서를 보란 듯 배격하고 해체해 버리는 혼돈과 파괴의 암전과도 같다. 하지만 헐렁하게 비어있는 공간과 구체성이 결여된 오브제들은 놀랍게도 즉흥적 감흥에 의한 배설이 아닌 지속적인 관찰과 사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데모니시(damonisch) 같은 것들의 언저리에 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생각의 골짜기에서 헤어나 본 적 없는 듯 한 작가의 그림은, 역설적이게도 최소한의 얼룩만 남기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결국 화면에 남아 있는 것은 충돌하는 다차원적 시점, 중력이 소멸된 진공상태, 구부러지고 꼬꾸라지고 떨어져나가고 처박히는 형태, 여백이 많은 화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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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_종이에 유화_95x110cm_2020

 

 

박다솜의 노트를 보면, 그가 인간의 죽음, 특히 그가 사랑하는 어른들의 예외 없는 노쇠 과정을 애잔하고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떠한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생각에 늘 깊이 묶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바로 세운다, 똑바르다 등의 표현들은 구부러지고 휘어진 것들이 부정적인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박다솜은 취한 사람의 몸, 넘어지는 몸, 휘어진 고령자의 몸 등이 갖는 ‘기울기’의 프리즘에 모든 것을 관통시키는 작업을 통해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오고 있음을 고백한다. 구부러지고 기울어진 선들이 아프고 쇠락해 가는 것의 표상이라는 부정적 관점에서부터 긍정적인 의미를 찾고 있다. 구체적인 형태나 사건의 디테일들을 모두 탈락시키고 오로지 기울기, 즉 기울어진 선이라는 추상적 모티브만 남긴다. 이는 고통스러울 수 있는 현실이 필터를 갈아 끼운 후 다른 톤으로 변환되는 결과를 낳는다. 모든 삶이 죽음으로 가는 길목의 순간순간이라는 우울한 생각들이 왜 머릿속을 지배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기울어진 형태로 이뤄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뻔한 인생의 결말을 블랙 코메디처럼 환기시켜 보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연극이자 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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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진 사람_종이에 유화_151x167.5cm_2020

 

 

사실, 그가 보여주는 화면의 세계는 꿈이나 SF(Science Fiction)물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차원이 뒤섞이고 바닥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공중에 떠 있거나 괴이한 형태로 변형이 되어 있거나 구부러진 형태로 환원 되는 장면들. 꿈의 세계가 SF 즉 공상과학과 맞닿아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과학이 무의식 세계의 비현실적 이미지들을 현실 속에 실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꿈에서나 가능했던 초월적 상상 세계는 이제 진짜 문자 그대로 현실이 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상상과 꿈이라는 비물질적 세계를 물질세계로 옮겨 와 주는 제 1선의 전령이 되었다고 모두가 입을 모으는 시대가 올 것을 알았는가? 단순히 편리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기술문명의 지배가 아닌, 땅을 기반으로 한 세계를 수중 세계로 완벽하게 이동시켜 버리는 것과 같은 세계 말이다. 첨단과학이 만들어 내고 있는 세계의 본말이 궁극적으로 비합리적, 비과학적 세계라는 역설을 보게 된다. 기술로 실현되어 우리의 감각세계로 들어오기 전에는 허무맹랑한 망상이나 나약한 자들의 믿음 정도로 취급되어 온 것이 꿈과 상상이지만, 대부분의 과학기술 발명의 역사는 그런 인식들이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반복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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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_캔버스에 유화_117x91cm_2021

 

 

딱히 뭐라 규정할 수 없는 대상은 완벽히 새로운 것의 도래 일 가능성이 크다. 온라인과 현실을 접목시킨 새로운 가상세계이자 새로운 현실세계, 또 하나의 유니버스인 메타버스(Metaverse). 온라인 공간에서 나를 대신해 주는 캐릭터인 아바타(Avatar)는 이미 20년 도 전에 존재했지만, 가상(假象)이라는 설정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인형놀이와 같은 개념에 머물렀었다. 그러나 현실과 초 연결된 메타버스 속 아바타는 실질적인 쇼핑을 하고 공연을 관람하고 새로운 안무를 배우고 스타의 사인회에서 사인을 받아 오는 등 현실의 거의 모든 것을 살아내고 있다. 지금까지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어 보지 못한 어떤 세계가 과학기술 위에 구축되고 있다. 이로서, 비언어적, 비합리적, 규정불가의 세계는 거짓이 아닌 진실, 현실의 또 다른 버전이라는 위상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여기서, 특정 구조와 철학, 세부요소들을 갖춘 것을 하나의 세상이라 한다면, 박다솜의 ‘기울기’ 세계도 새로운 유니버스로 존재하게 된다. 무의식 속 암울한 터널을 빠져 나오며 공포와 슬픔의 현실을 정면 응시한 작가의 대안인 ‘기울기’, 이 가상적 프레임은 박다솜의 유니버스이자, 현실과 초 밀착 공존하는 일종의 메타버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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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기 싫은 아이_캔버스에 유화_194x130cm_2021

 

 

박다솜의 ‘기울기’는 또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첫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기울기 그 자체가 대체 쓸모 있는 화두인가 라는 질문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연민과 긍휼의 마음에서 비롯된 작가의 독특한 관점이자 새로운 가치로서, 흥미롭게 주목해 볼 대목이다. 둘째, 사람과 사물 모두가 기울기라는 연민의 프레임을 통해 동등한 관계를 맺게 된다. 기울기로 치환시키는 행위는 위계를 없애는 주술이 된다. 모두가 기울기로 치환되면 공평해진다. 셋째, 이것은 또한 어쩌면 가장 예술적인 시도이다. 예술이 본질적으로 잉여라는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박다솜의 예술은 잉여의 세계 중에도 가장 극단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쓸모없음, 비합리, 무의식, 불연속, 소멸, 해체 등에 기반 한 기울기의 세계. 그것이 지닌 예술적 가치는 크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꿈을 현실과 의식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로 보며 꿈의 위치를 격상시켜 놓았지만,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있다. 물리학자, 수학자, 엔지니어, 과학자들은 세상을 대부분의 비선형(Non-linear)과 혼돈으로 가정하고 그 기반 위에서 다양한 연구 과제와 그 해결책을 찾아가고 있다. 꿈이나 환상이 외설이라고 단언할 자는 누구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도출해낸 박다솜의 ‘뜨거운 기울기’. 그 프레임과 구조가 만들어 낸 메타버스가 쓸모없는 외설이라고 말할 자는 누구일까?

 

 

 

 

 

김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