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_포스터_In_to_the_unknown.jpg

 

 

 

 

불완성(Into the Unknown), 예술이 있는 어떤 자리 

 

 

‘완성(完成)’은 의심의 여지없이 통용되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완성의 반대편에는 완성의 지연을 뜻하는 ‘미완성(未完成)’, 혹은 ‘시작’만이 자리하고 있다. 완성은 사전적으로 ‘완전하게 다 이루다’와 함께 ‘끝내다’는 뜻을 모두 갖는다. 끝은 다른 시작의 전제가 되지만, 더는 살피거나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도 된다. 굳게 닫히고 봉인되는 문. 만약, 완성의 존재 자체를 반문한다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태야 말로 완성이다’라는 누군가의 주장을 보편적 진리로 내세울 수 있을까? 완성의 기준이 미리 제시되어 있는 경우라면 시험지의 정답을 맞추듯 처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체계적으로 설계되고 관리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완성은 일종의 약속이라 할 수 있다. 남과의 약속,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 무엇을 완성으로 볼 것인가라는 관점, 그리고 이해관계자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완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불완성(不完成)’을 규범적 메트릭스를 해체하는 제안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결코 완전함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의, 세상에는 없는 단어 ‘불완성’.

 

완성의 존재를 의심하는 ‘불완성’의 관점은 변화를 적극 수용하는 태도와 연결되고, 결국 ‘알 수 없는 세계(Unknown World)’와 동반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해 누군가는 공포를 떠올리기도 하겠지만 그와 반대로 낙관적 미래를 꿈꾸는 이들도 공존한다. 우리의 감각과 선택이 그 어느 쪽으로 향하든, ‘알 수 없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은 변화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정지상태가 아닌 끝없는 움직임과 연결된다. 움직이는 대상은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운데, 더 정확히는 반복적인 패턴이 읽히지 않는 ‘다음을 예측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갖는 대상들에 대한 이야기다. 생물(生物). 또한, 우리가 나눌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적절히 매개되었을 때 일어난다. 사실, 알 수 없다는 것의 명명은  알 수 있는 것, 알고 있는 것들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번 플레이스막2에서 만나게 되는 박다솜, 백경호, 서원미, 유창창, 네 작가 역시 각각 서로 다른 의미와 방식으로서 완성의 기존 통념을 전복시키고 있다. 현실 세계나 과거의 궤적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또 한편 그것들을 변형, 부정, 재전유 (Re-appropriation)하며 새로운 예술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완성과 종결의 도그마적(dogmatic) 의미를 부정하는 장면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발견, 설계 바깥의 우연, 자기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질문 등에 몸을 맡기는 선택과 연결된다. 자기 작업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스스로 내던져 버리는 행위들은, 흡사 다가올 무언가를 조심스레 따라가 보는 ‘여정’과도 같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만 같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도(Godot)’씨는 누구일까? 

 

 

2.900_박다솜_머리 말리기(After a Shower), oil on paper, 70x89cm, 2020.jpg

 박다솜_머리 말리기(After a Shower)_oil on paper_70x89cm_2020

 

3.900_박다솜_샤워(Shower), oil on paper, 70x89cm, 2021.jpg

박다솜_샤워(Shower)_oil on paper_70x89cm_2021 

 

블록 놀이, ‘오늘의 영업을 종료합니다.’ 

박다솜 작가는 특히 애착을 갖는 가족이나 자신의 생활공간과 밀착된 다양한 대상들을 작품의 요소로 가져온다. 그리고 ‘기울기(gradient)’라는 매우 강력한 자기만의 시선으로 대상들을 해체, 교환, 재조립한다. 밀도 높은 관찰을 통해 자유자재로 대상군의 구조 일부를 ‘갈아 끼우는’ 하는 이 과정은 마치 블록 놀이를 연상시킨다. 신작 <머리 말리기>(2021), <샤워>(2021), <롤러코스터>(2021), 역시 이 ‘놀이’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개연성이 없던 두 대상(인간과 비인간)은 박다솜의 시선에 장착된 ‘기울기’ 라는 필터를 통해 자신들의 구조 일부를 교환하게 되고, 이 기울기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기존에 없던 관계가 서로 형성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의 결과물은 감각적인 색채와 붓질, 비논리적 공백을 채우는 위트, 아리송한 친근함과 연합하여 관람자를 유혹한다. 화면을 마주하는 관람자는 자신이 보고 있는 그 이미지들을 왠지 알 것만 같다. 아니 알아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판독하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것이다. 철저히 작가의 주관적 관점과 기준으로 이미지의 부분 부분을 바꿔치기 해 놓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박다솜의 작품 앞에서 작가 본인이 아닌 타자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뉘앙스’ 뿐 일지 모른다. 흥미로운 사실은, 작가 자신도 자기 작업이 어떤 길로 들어설지 끝까지 가봐야만 알게 되고 그때서야 끄덕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농담, 장난과 같은 개입들이 특정 행위들이 완성될 수 없도록 방해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방해’가 박다솜에게는 오히려 즐거운 놀이, 창작의 자극제가 되며, 어쩌면 완성을 ‘영구히 지연’시킬 수도 있다. 관람자가 작품을 감상하게 되는 순간은 작품이 완성된 상태라는 전제를 담보한다. 그러나 실상은 작가가 선택한 종료 지점이 완성으로 통용될 뿐이며 이 완성은 그저 임시적이다. 작가에게는 무한대로 이어질 수 있는 ‘장난질’이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로 매듭 하는 것이다. 그리고 벽에 걸린 작품 앞에서 그는 연신 혼잣말과 함께 발을 동동거린다. “완성해야 하는 데...”  

 



4.900_백경호_Strokes_oil on canvas_192x225cm_2021.jpg

 백경호_Strokes_oil on canvas_192x225cm_2021

 

5.900_백경호_Untitled_oil on wood panel_193.1x201cm_2021.jpg

백경호_Untitled_oil on wood panel_193.1x201cm_2021

 

뻔뻔한 실험, 예술적 낭만

한편, 선택의 순간에 늘 ‘참신한 것’을 고르게 된다고 말하는 백경호 작가는 자신의 이전 작업들 속에서 원석을 골라내듯 새 작업의 단초를 찾아내고 있다. 작위적이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 가운데 행해지는 이것은 단순한 자기복제와 달리,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미래를 기대하는 확장적 의지의 선상에 있다. 결정화된 구조와 패턴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으려는 그에게 이런 작업과정은 가보기 전에는 결과 값을 알 수 없는 일종의 모험이자 발명 실험이다. 전시를 위해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잘 모르겠다” 였다. 그때는 그 말이 꽤 괜찮은 ‘입증자료’로 사용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쨌든 그는 2020년부터 ‘줄긋기(Line Structure)’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2012년 <나를 지켜줘>의 화면 하단 1/3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결선들에서도 전조를 볼 수 있다. 작가에 따르면, 그의 줄긋기 연작들은 그가 감정 없이 하는 행위, 부분(사건)과 부분(사건)을 잇는 공백에서 건져 올린 부산물이다. 보자, 오로지 <나를 지켜줘>의 구성을 위해 부차적으로 존재했던 행위의 흔적들이 어느 순간 주인공으로 부활하며 다른 시리즈를 추동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길을 가는 ‘모험적 실험’ 이 가져다 준 결과는 참아왔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듯 한 붓질들의 현재다. <untitled>(2021), <strokes>(2021) 등에서 나타나는 ‘휘 갈기기’, ‘화장실 낙서’, ‘침 뱉기’ 같은 것들을 관람자가 왜 보아야 하는가 묻는다면? 그를 아끼고 그의 작업적 궤적을 좆던 이들에게는 또 다시 새롭게 뒤틀린 화면이 주는 배가된 즐거움, 불특정 다수에게는 ‘모범적 화성(chord)’을 깨버린 ‘참신한 선택’이 만들어 낸 해방감으로 화답해 볼 수 있겠다. 진지함과 유머를 한데 뒤섞어 버리는, 아니, 제대로 섞지도 않은 호탕한 ‘뻔뻔함’을 보라. 호불호(好不好)는 철저히 관람자의 몫이다. 그저, 관람자의 마음에 들 만한 것을 미리 상정하지 않는 태도가 형식으로 확장된다면, 이러한 형식은 또 다른 유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수행이 아닌 ‘다가올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속하던 그의 줄긋기가 ‘감정의 붓질’, 낙서들로 ‘망쳐진’ 신작들로 나타났다. 이것은 또한 앞으로 무엇을 향해 열릴 시그널일지, 작가도 즉답이 힘든 이 물음표를 던져 본다.   





6.900_서원미_파랑(Blue), oil &amp; acrylic &amp; spray on linen, 72.7x91cm, 2021.jpg

 서원미_파랑(Blue)_oil & acrylic & spray on linen_72.7x91cm_2021

 

7.900_서원미_포옹(Hug), oil &amp; acrylic &amp; spray on linen, 91x91cm, 2021.jpg

 서원미_포옹(Hug)_oil & acrylic & spray on linen_91x91cm_2021

 

아나키스트의 탈을 쓴 소녀의 탈을 쓴 아나키스트의 ...

최대한 그림의 방향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는 서원미 작가는 “그림의 끝과 완성은 ‘발견’하는 것에 가깝다”고 고백한다. 예상을 벗어난 결과들을 오히려 흡족하게 받아들이는 이런 작가의 태도는 낭만적이기 보다 아나키스틱(Anarchistic)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칼 슈미트(Carl Schmitt)가 논하 듯, “우연이라는 마법의 손길에 이끌려 끝없이 방황하는 세계”, “각자 알아서 스스로의 사제가 되도록 방기되는 ‘사적 성직주의(Priestertum)’”처럼 ‘개인이 종교가 되는’ 식의 낭만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자발적, 자생적인 것을 지향하며 더 나은 공동체와 세계를 추구하기 위해 제도, 권력, 관습을 부정하는 해체적 방법론에 가깝다는 뜻이다. 칼 융(Carl Gustav Jung)은 우리에게 ‘자아(ego)를 벗고 자기(self)를 만나야 한다’고 촉구한다. ‘나’의 의식적 판단 강도를 최대한 낮추고 그 가운데 발견되는 것들을 편안하게 흡수하여 지경을 넓히는 태도는, ‘삶의 경험적 주체로서의 나(ego)’를 넘어서서 ‘의식과 무의식 양극성의 평형점에 있는 나(self)’를 발견하는 여정이며,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을 희망하는 반증, 그리고 더 위대한 예술의 자리에 가 닿을 수 있는 비책일 수 있다. 

 

이것은 기법적으로 “사실적으로 그리다가 다시 뭉개고 다시 사실적으로 쌓다가 지우는 것을 반복”하는 방향과 연결된다. 서원미에게 ‘그리는 행위’는 1차적으로 ‘뭉개지는 행위’를 위해 존재하지만, 이 과정에서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이미지들은 과거의 죽은 무(無)가 아닌 미래의 살아있는 무(無)를 향하며, 결국 새로운 세계로 확장해 나가는 존재라는 변증법적 과정에 있다. ‘그리는 것’과 ‘삭제하는 것’을 분리하지 않고 연결하는 그의 작업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본질을 탐구하는 그의 기질은 대척점에 놓인 대상들을 유기적으로 연결 짓는 과정에서도 발견된다. 역사적 사실과 개인의 서사가 연결되고 인간과 유령이 연결되는 작업들은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혹은 역사에서 소외된 개인들)‘을 현실로 소환하는 행위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존재, 물질도 비물질도 아닌 경계에 있는 포위된 존재인 유령으로 표상(representation)되는 것은 결국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개인적 찌꺼기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지점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이번에 만나게 되는 ‘카니발헤드’ 시리즈와 <파랑>(2021), <포옹>(2021)에도 역시 삶과 죽음의 경계적 존재인 유령의 흔적이 본령(element)처럼 나타난다. SNS에 등장하는 코스프레(costume play)나 할로윈 이미지를 가져 온 <카니발헤드002>(2015-2021)의 분위기는 으스스하다. 단지 기괴한 분장들을 묘사한 결과는 아니다. 신경증적 붓질과 톡톡 튀는 색채와 선의 사용, 그리기와 지우기의 반복이 만든 뭉개진 공백들의 뮤트(mute). 이는 분열된 페르소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선언하며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파열된 내면을 극대화한 것, 혹은, 기성세대의 권위와 부조리에 ‘깽판을 놓는’ 젊은이의 문화적 전유를 작가가 다시 극단적으로 재전유하여 사용하는 전략 어느 쪽으로도 읽을 수도 있다. <카니발헤드002>가 부릅뜬 응시에 가깝다면, 상대적으로 온화한 색채나 붓질, 편안한 여백이 살아있는 <파랑>이나 <포옹>은 여린 소녀의 속 떨림이 스며든 곁눈질과 유사하다. 또한 이번 작품들은 색채와 소재, 기법 면에서 ‘블랙커튼’ 시리즈나 ‘Facing’과 다르지만 ‘잔혹한 현실 마주보기’ 라는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직시든 곁눈질이든 회피하지 않는 태도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서원미는 망령처럼 떠다니는 것들을 실체화하며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을 걷어내 가고 있다. 의식화된 나(ego)의 판단과 감각을 내려놓으며 언제가 만날 자신(self)을 찾고 있는 여정. 영원히 그 무언가를 찾아가는 여정으로만 채워지는 삶도 충분히 좋을 수 있다. 빡빡하게 직조된 규범적 이데올로기의 표면은 이미 얼룩과 흔적들로 변화되고 있다. 

 



 

8.900_유창창_야.왜(Hey.Why)-02, mixed media on canvas, 145.5X97.0cm, 2019-2021.jpg

 유창창_야.왜(Hey.Why)-02_mixed media on canvas_145.5X97.0cm_2019-2021

 

9.900_유창창_야.왜(Hey.Why)-04, mixed media on canvas, 145.5X97.0cm, 2019.jpg

  유창창_야.왜(Hey.Why)-04_mixed media on canvas_145.5X97.0cm_2019

 

웃어요~! 순딩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순수예술과 만화를 넘나드는 유창창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바둑 두기에 비유한다. 그것도 바둑판을 여러 개 두고서 혼자 두는 바둑. 자신이 토해 놓은 작품을 응시하며 대상화(objectification)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런 비유는, 화면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대하는 태도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 형식이 종횡무진 다채로운 것도 이 때문일까? 사실, 삶에서든 예술에서든 중요한 것은 ‘메시지’와 ‘본질’이라고 믿는다면 형식의 실험은 극적으로 유연해 질 것이다. 그의 작업세계 내에서 보면, 만화는 무겁고 회화는 상대적으로 가볍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의 무게 값이 같아지는 효과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만화는 과자를 입에 넣으며 낄낄대며 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순수미술은 단정하게 갖춰 입고 조용히 의미를 음미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소위 엘리트 장르로 일컫는 순수미술과 대중적 장르인 만화를 아우르며 극단을 오가고 있는 그는 이 접시돌리기 묘기에서 기막힌 균형점을 잡고 있는 셈이다. <야, 왜>(2021)속에 ‘슬렁슬렁 주루룩’ 붓질과 함께 ‘날카로운 선’이 공존하거나, ‘귀엽고 동그란 형태’와 함께 ‘공격적인 표정’이 공존하는 것을 발견하며 양가적 매력과 균형 잡기를 재확인한다.  

 

소통에 방점을 두는 작가의 관심은 이미지의 묘사 방식에서도 발견되지만, 타이틀 <Dear>, <당신과 나 사이에>, <우린어쩜이렇게철딱서니가없을까> 등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나가는 이들을 불러 세우고 도발하는 제목 <야, 왜>(2021)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중심에 늘 사람과 관계가 자리하고 있다. “펼쳐보고 나서야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다”는 그의 고백을 보자. 대상/상대에게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지만 그것을 수용하고 즐기겠다는 관용과 예술가적 진정성을 가늠하게 한다. 바둑도 혼자 두는 상상을 즐기는 그는, 퀴즈도 혼자 내고 혼자 푼다. 셀 수 없는 다양한 인물들의 입장에 작가의 감정을 이입해야 하는 만화작업의 영향일까? 회화작업 역시, 자아를 분열 시켜가며, 혹은 분열되는 자아를 즐기며 이어 나가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작업의 유형도, 작업 속 이미지도 ‘산만’하지만, 이 자체가 그의 유토피아로 읽힌다. 산만한 것들이 유기적으로 공존하는 ‘유창창 월드’. 허나 그가 바라는 고정된 상은 없다. “죽거나 실종된 만화가의 말 칸을 완성하는 기분”으로 작업을 한다는 그의 고백 또한 그 반증이다. 상대가 말하도록 기다리고 자기 자신도 객체화하는 과정이 담긴 유창창의 작업은 영원히 완성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관람자와 호흡하는 매 순간이 완성으로 표시 될 뿐...  

 

따라가다 보면...

완성이 없다고 보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계속 움직일 뿐이다. 움직임은 곧 ‘변화’와 연결된다. 어떤 대상을 제어하고 통제하기 위해 정지를 요구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꼼짝마’, ‘가만히 좀 있어봐’ 라는 상대의 외침이 주술처럼 사용된다. 즉, 정지 상태는 대상을 통제하고 무력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는 셈이다. 반대로, 완전함을 이룰 수 있다는 맹목적 믿음을 내려놓을 때의 보상은 살아있음의 반증인 변화이다. 그 변화가 늘 좋은 결과를 도출한다고 보장할 수 없겠지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영구하지 않기에 연연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무엇보다, 자신도 알 수 없는 길이 계속 펼쳐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 창작에 원동력이 될 수 있으니 완결, 마감, 안정, 통제 등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경우라면 도리어 반가워 할 일이다. 안정과 통제에 대한 강박을 떠나는 용기, 즐길 줄 하는 자유가 충만한 네 작가의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진정한 예술이 있는 어떤 자리에 닿아 있을 것이다.  

 

김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