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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1 ~ 9. 21

 

김 미 라 , 김 소 원 , 민 2 , 이 마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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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정상과 평범한 비정상

 

 

에이블아트센터의 작가들은 모두 발달장애를 지니고 있다. 발달장애라는 것은 발달이 나타나지 않거나 지연되어 사회생활에 제약이 있는 것을 이야기 하는데 그 범주에는 지적장애, 자폐성장애, 정신장애가 있다. 나는 작가들과 생활하며 발달장애에 대한 어떤 편견도 지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장점이 ‘장애’라는 틀에 갇혀 발현되지 못 하는 상황들을 자주 마주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의 사회생활에 제약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고 표현하는 데에는 어떤 제약도 없기를 바랐다. 처음에는 발달장애에 관한 정보를 찾아 그들을 이해하는 근거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정보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었고, 대화하는 방식을 찾았고, 문제가 일어났을 때 해결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더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발달장애는 지문과 같아 사람마다 다 다르고 분류할 수 없으며 타인의 장애를 인정하고 관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달장애는 의사결정이 어려울 것이라고 미뤄 짐작하지만 분명 그들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저마다의 독특한 소통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이해하는 보호자를 통해서 혹은 스스로 의사 결정의 여부를 표현 할 수 있다. 작품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재료나 색을 고를 때에 혹은 작품을 마치는 선에서 그들이 하는 선택하는 방식과 결정 등은 비장애인과 다를 뿐이다. 선 하나, 색 하나. 그들의 모든 것이 특별하다. 특이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누구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하다. 하지만 그들도 다를 것은 없다. 그들의 특별한 방식에도 깊이의 선이 있다. 발전의 과도, 발달장애 작가 또한 그들이 가진 특별함 때문에 노력이라는 과정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특별함에서의 노력은 또 다른 특별함에서의 노력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 그들은 노력으로 발전한다. 발전한다는 그 사실이 특별함을 아주 평범한 것으로 전복시키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점이다. 

 

45년전 데이비드 로젠할 박사는 정신의학의 진단 기준이 ‘결국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렸다’고 말했다. 이것은 정신의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결론적으로는 진단에 대한 모호한 기준을 없애기 위한 노력의 근원이 되었다. 장애-비장애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듯 하면서도 먼 ‘개인과 타인’ 그리고 ‘같음과 다름’의 문제는 영원히 의문스럽고 불균형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게으름을 깨워 다름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균형을 찾으려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 모두가 특별한 정상인 동시에 평범한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본 전시에서 다루는 정상과 비정상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우리에 관한 것이다. 정상이지만 비정상이고, 장애라는 틀에 갇혀 비정상인 듯 보이지만 비정상일 것이 하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너무나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누군가를 어떻게 봐라봐야 하는 지에 대한, 그리고 현저하게 다른 것들 사이에서 궁극적으로 같음을 이해해야하는 수고에 대한 고민의 자리가 되고자 한다.

 

 

 

기획, 사단법인 에이블아트  이 지 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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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로_우리는 형제입니다(대한민국) 4_39×54_볼펜과 마카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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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라_Silence is golden_싱글채널 비디오_L000500_ 2017

 

 

 

 

 

 

 

Normal . Ab . Normal

 

"나는 나의 개념들을 만들고 주조하고 부순다…"

 

 

1. 

 누군가 진료실에 앉는다. 긴장한 표정이다. 그들은 뭔가 불편하기 때문에 내 앞에 앉는다. "내가 이상한가요?" 나에게 떨리듯 묻는다. 그 순간에 나는 자동적으로 뭔가를 떠올린다. 최근의 정신의학의 진단 기준이다. 많은 질문과 답은 그 기준 안과 밖에서 스케치하듯 움직인다. 결국 이성이 만든 그 기준은 그를 정상/비정상의 범위에 따라 이동시킨다. 이는 비단 정신의학의 풍경이 아니다. 다른 모든 의학도 수없이 많은 정상/비정상의 범위를 소유하고 이를 적용한다. 의학은 그럼으로써 진단의 판단을 하며 도움을 준다. 물론 그 기준의 범위를 위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경험의 근거가 존재한다. 이것은 필수적이나 때론 무거운 의학의 시선이다. 나의 작은 진료실에서 그 무거움을 경험한다. 정신과학의 정상/비정상 판단은 다른 의학과와 다른 역사적으로 짙은 어두움의 흔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과 대면할 때 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상 대인관계에서 편할 수 있는 건 우리 모두에게 선험적 형식의 틀, 도식이 존재하고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 도식은 시대적으로 변화하면서 우리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하였다. 원시 시대부터 불안한 인간에게 그 도식의 존재와 적용은 필수적이었고, 어쩌면 생사의 순간에서 만든 인간의 생존 도구였을지 모른다. 그런 도식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를 관통한다. 절대적 권력자의 선과 악의 기준과 판단은 자동적으로 권력자의 아래에 있는 이들의 기준이 되어왔고 권력자의 정치적 힘이 강할수록 그 기준의 강도는 견고했던 것이다. 

 판단할 수 있는 권력자, 그 심급의 위치는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개인의 발달 과정에서 내면화되어 작동한다. 내면의 지배자, 그 힘의 주체를 프로이트(S. Freud)는 초자아(superego)라고 불렀다. 그가 말하듯 초자아의 역사는 우리 사회, 문화의 역사이며 한 개인의 무의식 안에 침전물로 심리적 유전을 한다. 푸코(M. Foucault)가 역사의 현상에서 편재하나 의식하기 어려웠던 권력의 존재를 세밀한 분석과 날카로운 사유의 힘으로 드러냈던 것처럼 프로이트는 마음의 발달의 관점에서 깊은 심층의 공간에서 영향을 주는 내면의 권력자의 실체를 밝혀냈던 것이다. 

 

 푸코가 그의 삶의 여정에서 끈질기게 말했던 비이성, '광기'는 이성/판단의 힘이 시대적으로 실체를 드러낼수록 감금과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즉 이성의 냉철함은 인간을 문명과 질서의 세계로 인도했지만, 그럴수록 광기는 우리의 의식에서 멀어져 무겁고 차가운 철창 안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광기란 개념의 일부를 발달학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인간의 본능, 그것이 정서적으로 표현된 상태(sexuality, aggression), 즉 이드(id)라고 불렀다. 또한 광기가 사회적으로 감금당한 것처럼 이드도 우리 인간의 의식에서 추방되어 무의식이란 깊은 어둠에 숨을 쉰다고 하였다. 무질서와 불안을 야기한다는 이성의 판단 속에 그들은 의식의 경계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그럴수록 인간이라는 테두리는 좁아진 반면에 소외된 그 에너지와 힘들의 목소리는 지진처럼 더 커지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지진의 힘을 듣는 일군의 사람들이 예술가라고 하였다. 즉 프로이트가 이론화한 무의식의 힘을 그들은 그 시기 전부터 감지하고 글로 또는 이미지로 표현해 왔다. 그 운동이 구체화되고 브레이크 없는 추진력을 가지게 된 시기는 바로 예술의 역사에서 아방가르드 시기이다.  이들은 이성이 만든 사회 구조의 끝에 서서 시대적으로 인간과 사회를 무의식중에 지배했던 형식/권력의 테두리를 해체하고 재구조화하였다. 그들의 최전선의 투쟁적 활동을 통해 많은 캡슐 속에 감금되어 있었던 감정/감각/사고의 덩어리들이 다양하게 의식화된다. 이들에게 규정되지 않은 불안정한 힘과 에너지는 자신의 형식으로 재구성해야할 대상이다. 이로써 예술은 이제 규정되고 불변한 울타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파괴하고 증식하는 생물체가 된 것이다.  이처럼 예술의 세계와 시선은 정상/비정상의 고루한 틀에서 멀어져 왔다. 저 끝에서 저 좁은 테두리를 보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란스럽다. 의학이나 과학 등 일상생활은 우리에게 정상/비정상의 범위와 기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그것에 의해 판단을 하고 받지만, 철학이나 예술, 문학의 공간에서는 그것을 비웃는 듯 그 기준이 희미해진다. 인간이 그렇듯 우리가 어떤 시선의 힘이 지배하는 공간에 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self representation)이 변화한다. 이렇듯 혼재된 시선들이 다투듯 섞인 우리 현대인의 삶의 공간은 어지럽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실제 현실에서 시·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적인 얼굴을 가진 것이다. 

 

 이 전시는 이런 시선들의 '혼란스러움' 자체,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인간'을 각 공간에서 함께 표현하는 듯하다. 정상과 비정상은 더 이상 예술의 공간에서 무의미한 담론이었지만, 이들이 사회의 시선과 함께했을 때 느껴지는 혼란스러움의 공기는 여전히 다루어지지 않은 소외된 것들이었다. 이들은 이 공기의 무게를 예술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 떠다니는 기준들과 힘들, 그리고 그 안에 숨쉬는 인간의 공통된 테두리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는다. 

 

2.

 이마로, 김미라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그 시작점으로 한다. 그들은 언뜻 보기엔 만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작업을 주어진 공간에서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듯 표현한다. 이마로 작가는 특히 그렇다. 그는 지금 행복하다. 자신이 주어진 공간에서 마음껏 호기심을 가지고 주변을 보며 세상을 꿈꾼다. 그에게 예술의 공간은 우리가 잊어왔던 '놀이'의 공간이다. 마음껏 보고 마음껏 느낀다. 그의 감각과 감정이 살아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즐겁고 행복하다. 이는 사실 우리 내면 안에  숨겨져 있었던 따뜻한 공간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만의 독특한 선과 색으로 표현한다.

 김미라 작가는 이마로 작가와는 다른 출발점을 가진다. 이마로 작가가 인간 내부 깊은 곳에서 진동을 한다면 김미라 작가는 그 바깥에서 그 구조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무겁다. 이성이 만든 비이성, 그 기준(standard)에 대한 작가의 고민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현상과 그 근원적 이유로 향한다. 인간의 절대적 필요를 해결하며 우리의 삶에 밀착된 자본권력은 은밀하지만 강력하게 우리 삶을 조형한다. 그 상징적 대상인 '상품'은 인간의 필요를 넘어 인간의 몸 전체를 그들의 기준 안에 포획한다. 이제 인간의 실존은 그 상품으로 교환되는지 모른다. 이성이 만든 기준의 판단 권력의 위치가 현 시대에서는 '자본'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작가의 초점이 된 그 자본권력은 작가의 독특한 예술적 시선으로 바닥부터 분열적 (schizo-)으로 해체되고 조합된다. 작업을 언뜻 봤을 때 느껴지는 그 난해함과 '논리의 부재, 지리멸렬함'은 바로 정신분열병 증상의 특징이고, 이는 다름 아닌 이성과 공모한 '정상'이 만든 '비정상'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다. 여기서 작업 공간의 힘이 느껴진다. 작가는 정상과 비정상으로 갈라진 두 공간을 전복시킨다. 자본에 의해 함몰된 정상이 비정상을 바라보는 가장 폭력적 시선을 그대로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작업 아래 깊게 흐르는 작가의 감정을 느낀다. 이는 이마로 작가가 간직한 인간의 소중한 심장의 소리, 자본권력에 의해 훼손된 그 공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아닐까? 이들은 이렇게 만난다. 

 

 위 두 작가와는 다르게 김소원 작가와 민2 작가의 만남은 직접적이다. 그 융합의 힘이 강하다. 김소원 작가가 그리는 단순하면서 소박한 그림들, 이는 이마로 작가와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성(gender)의 차이로 인해 여성만이 느끼는 소중한 순간이다. 성(sexuality)과 호기심, 몸의 발달로 인한 나와 주변 사람에 대한 낯섦, 그 혼합된 감정적 체험은 어릴 때 꿈꿔왔던 안정적인 환상의 세계에서 이탈시킨다. 이러한 생의 전환의 순간은 매우 고통스럽다. 모두 공유하지만 밟기 싫은 불안정한 땅에서의 시간인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때로는 강압적이다. 그 흐름 속에 나를 경험하는 것은 나의 감각과 이어진 감정과 기억들이 엮여진 총체적인 움직임, 그 순간의 대면인 것이다. 민2 작가는 그 순간을 정지시켜 작업을 해왔다. 그는 그 순간에 자신의 응축된 기억들을 소환하여 평면에 또는 설치를 통해 표현하였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순환하는 작가의 예리한 시선은 김소원 작가가 걷고 있는 경사진 땅에서 조응한다. 어쩌면 현재 김소원 작가의 지점이 바로 민2 작가가 다가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금기의 땅이었는지 모른다. 결합된 세계의 외면은 확연히 구별되지만 내면 에너지는 융합되어 끊임없이 운동한다. 그래서 두 작가의 만남은 아름답다. 두 작가의 형식적 만남이 아니라 두 인간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비록 민2 작가가 그 힘을 영상 속에서 분출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울리지만 그 기반의 힘은 김소원 작가가 힘겹게 지키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의 자리인 것이다.

 

3.

 이렇게 네 작가들은 정상과 비정상이란 커다란 담론의 지도에 자신의 점을 횡단하듯 그렸다. 각기 다른 자리에서 다른 색을 내고 있지만 그들은 어느 지점에서 깊이 만나고 울린다. 그 만남의 자리가 우리와도 다르지 않은 것은 그들이 같은 우물, 인간이라는 공통된 장소에서 물을 긷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예술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시도를 통해 인간이라는 무한한 땅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하지만 이성의 '완전함'에 대한 강박은 인간의 어떤 욕망과 결합하여 완전함/불완전함의 선을 짙게 그어왔고, 그 기준은 정상/비정상이라는 차이와 구별로 이어져왔다. 사회 권력의 어떤 시선은 그 필요를 넘어선 기울어진 도식으로 인간을 여전히 응시하고 있지만 예술은 역사적으로 불완전한/비정상적 표면을 시작점으로 인간의 영역을 무한하게 증식시켜 왔다. 예술로 인한 인간의 불완전한 공간의 확장은 그 경계의 지대에서 행해진 투쟁적 해체와 재조합의 결과다. 이 전시는 그 유동적인 경계의 선 어느 지점에 있다. 문득 드는 생각 하나. 그럼 왜 예술은 불완전한 인간 영역을 힘겹게 넓혀야 할까? 그 어떤 답을 저 멀리서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을지 모른다. 예술은 인간의 의해 행해지고,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작가  이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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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의 장애 
 
 
부끄럽고 한심한 고백이지만, 나는 장애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는 어른으로 자랐다. 주변에 장애를 가진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장애를 가진 이와 가까이 지낼 기회라곤 전무했다. 가끔 지하철 안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은 있다. 멈추지 않고 돌아다니거나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이들을. 사람들은 그들을 슬슬 피했고 나 역시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작년 한 해를 자폐성 발달장애 청년에 대한 책을 쓰면서 보냈다. 말했다시피 장애에 대해서는 아는 것 하나 없었기에, 타인의 인생에 대해 쓴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도 쉬운 일도 아니기에, 근 1년 동안 청년을 쫓아다니고 사진을 찍고 그날 본 것과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면서 나름대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청년은 발달장애 2급의 자폐성 장애인이었다. 그게 그에게 붙은 딱지다.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저 준수한 용모에 체격이 좋은 동네 청년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의 장애를 눈치 챌 수 있다. 어린 아이처럼 높은 톤의 혀 짧은 말투와 불안한 표정, 흔들리는 눈빛. 청년은 종종 자기 손바닥을 향해 무어라고 중얼거린다. 긴장하거나 당황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빙빙 돈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유 없이 벌떡 일어나 몸을 격렬하게 앞뒤로 흔들기도 한다. 
나는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마다 대화가 끊어지지는 않을지, 내가 쓸 데 없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닌지, 그가 나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싫어하는지, 헤어질 때는 나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게 될지 남몰래 걱정하곤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처음 이 친구와 단둘이 함께 다니게 된 날에도 같은 문제로 긴장이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오랜 버릇대로 그의 환심을 사려 노력하고 있었다.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주의했고, 친근하고 쾌활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아시다시피 그건 무척 피곤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아, 그는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구나. 
대화와 대화 사이의 공백을 그는 어색해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는 나와 눈을 맞추고 내 말이 엄청나게 중요한 말인 것처럼, 마치 이 세상의 마지막 말인 것처럼 열심히 들었다. 그는 나에 대해 판단하지도 평가하지도 않았다. 이 사회의 잣대를 나에게 들이대지도 않았다. 나를 만나기 전이나 헤어지고 난 후의 일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에게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해 보였다. 그런 면에서 그의 마음은 순수했고 그 순수함은 분명 장애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그는 농담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좋은 것은 좋아했고 싫은 것은 싫어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몰랐고, 해야 하는 것들을 왜 해야 하는지 몰랐다. 물론 오랜 세월의 피나는 노력 끝에 이 사회에서 환영받을 만한 태도를 흉내는 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완벽하게 납득하지는 못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비정상이었고, 또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순수한 인간이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이 정상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자기 자신이 진심으로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정상의 삶에 가까워지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말과 행동과 삶에 불쾌해하고 비난의 잣대를 들이대기도 한다. 그런데 남의 비정상에 그토록 가혹한 까닭은 어쩌면 내 안에 숨은 비정상에의 공포 탓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이 사회에 섞이기 위해, 이 사회의 비정상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강한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나 역시 마음 속 깊이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단지 배운 대로, 튀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과 말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 내가 이 사회에 걸맞은 존재가 되었다는 안도감과 ‘이런 것은 하고 싶지 않은데’의 불편함을 동시에 느낀 적은 또 얼마나 많은가. 정상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큰 고통을 떠안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내가 원하지도 않는 삶을 매일같이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선은 사실은 정말로 가늘다. 그리고 불완전하다. 언제고 그 선은 옅어지거나 구부러지거나 또는 끊어질 수 있다. 그 1년 동안 나는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다. 결국 발달장애인인 그들이 우리의 눈에 이상해 보이는 행동들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이 그들에게 너무 이상한 곳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장애라는 건 개인의 정신적, 신체적 특이성과 개성이 지나치게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장애를 끌어안은 채 산다. 
   
결국 그 책을 쓰는 일이 단순히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인생에는 때때로 뛰어넘어야 할 허들 같은 것들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그 시간이야말로 허들이었을 것이다. 허들을 넘었다고 해서 외형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떼돈을 벌지도 상장을 받지도 못했다. 당연하지만 키가 자라거나 얼굴이 예뻐지지도 않았다. 다만 나의 마음의 키는 적어도 5cm는 자랐을 것이다. 누구도 모르지만 나 자신은 안다. 그 허들을 넘으면서 나는 지금껏 안 적도, 본 적도 없는 세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 해에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종종 가슴이 벅차오르며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작가, 칼럼니스트  한 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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