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은
금성망막면통과
Dec 13 - 28, 2013 12pm-8pm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의 삶 한복판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던 적이 있었던가. 멈춰 설 틈도 없이 사로잡혀, 마침내 낯선 곳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어떤 날. 그날의 마음의 열병, 나는 그것을 열정이라 말하고 싶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무언가를 보기 위해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들의 보고자하는 욕망이 작가의 시선을 통해 전개된다.
전명은_그는 네 가슴에 단 한순간이라도 가까이 있고자 이 세상에 태어났던가
_스톱모션 영상_00:01:00_2012~3
# Scene 1 ● 2012년 6월 6일, 경기도 과천의 국립과학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들이 이곳에 모여든 이유는, 금성이 태양을 가로지르는 현상인 금성일식, 일명 금성 태양면 통과(Venus Transit)현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금성 태양면 통과는 금성이 지구와 태양 사이를 공전하다 태양의 전면을 가로질러갈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때의 기회를 놓친다면 105년 후에나 관측이 가능해, 살아생전 다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현상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이 현상의 전 과정을 볼 수 있어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날, 이 장소를 찾아왔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인「사진은 학자의 망막 - 엄태호, 금성태양면통과」역시, 금성 태양면 통과현상을 더 잘 보기위해 직접 만들어낸 아마추어 천문학자의 도구를 보여주고 있다.
전명은_그는 네 가슴에 단 한순간이라도 가까이 있고자 이 세상에 태어났던가
_스톱모션 영상_00:01:00_2012~3
# Scene 2 ● 러시아 뻬쩨르부르그의 텅 빈 도시. 이 도시에서 혼자만의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한 남자. 하지만 그것은 소통이 아닌 독백이었다. 이 지독히도 외로운 남자는 어느날 밤, 기약 없이 떠나버린 연인을 기다리며 슬피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내 사랑에 빠져 매일 밤 그녀가 있는 다리를 찾아간다. 이제 그의 하루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밤을 위해서만 존재했다. 그는 그 짧은 순간,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이다. 길고도 짧았던 사흘간의 밤. 하지만 그것은 한 낯 꿈같은 것이었다. 함께 휩쓸린 줄 알았던 사랑의 열병은 그만의 것이었고, 결국 그녀는 돌아온 연인의 품으로 떠나버렸다. 전시장내 설치된 작품「그는 단 한순간이라도 그대 가슴에 가까이 있고자 이 세상에 태어났던가」는 작가가 위의 줄거리의 원작인 도스토예프스키의『백야』에서 모티브를 얻어 구상한 작품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보고자 하는 욕망과 희귀한 천문현상을 보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엔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형태적으로는 다른 것 같으나, 고대하던 그(=금성)와의 만남(=금성 태양면 통과)이 마침내 이루어졌는데, 순간은 아주 짧고(=금성이 태양 앞을 통과하는 반나절의 시간)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금성 태양면 통과 현상의 희귀성), 이 두 마음속에 담겨있는 간절함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기 위해 시간과 공을 들였고,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더 불타올랐다.
전명은_이미지의 표면_유리에 스틸이미지 프로젝션_80×80cm_2013
전명은_이미지의 표면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40×110cm_2013
그리고 전시장 중앙에 떠있는 행성처럼 보이는 물체를 바라보았을 때, 망막을 담은 사진이 반투명유리와 겹쳐져 태양처럼 보인다는 사실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했던 금성 태양면 통과(Venus transit)현상을 볼 때처럼, 우리는 필터를 착용하지 않아도 시각을 잃을 위험성이 없이, 안전하고 황홀하게 이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눈앞의 광경들을, 그저 천천히 들여다보면 되는 것이다. ■ 한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