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1층 윈도우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Alice in wonderland의 한 장면, 흰토끼가 앨리스를 유혹하며 토끼굴로 인도하는 행동이 반복 재생되며 전시장 밖의 행인들을 향해 전시장안으로 들어와 보라는 듯 호객을 한다. 전시장 밖에서 윈도우를 통해 보이는 내부의 모습은 전시장을 가득 채운 완벽하게 푸르고 깔끔하게 정돈 된 언덕의 풍경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푸른 언덕이 인조 잔디 매트 중앙을 높이 들어올려 삼각꼴로 세운 가변적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앨리스가 흰토끼를 따라 토끼굴로 뛰어들어간것처럼 들춰진 인조 잔디 매트 아래로 걸어들어가는 동선이 제시된다.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 전시장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계단을 오르면 wonderland가 펼쳐진다.
CRUSTAISM은 각피를 뜻하는 영단어 crusta와 어떠한 상태를 나타내는 접미사 ism을 결합시켜 작가가 만들어낸 단어다. 인간은 자연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면서 본능을 억제하고 품위와 격을 높이는 방향으로 문화를 생산시켜왔다. 온실 속 화초처럼 생채기하나 없이 고결한 삶을 그리며 거듭 인공 각피로 자신을 두텁게 밀봉한다. 하지만 야성은 막으면 막을수록 내부에서 진물이 되고 차단막 바로 아래에서 언제든 틈새를 비집고 나와 악취를 풍길 준비를 하고 있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토끼는 별주부전과 토끼와 거북이 우화에 등장하는 캐릭터처럼 영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매한 결과를 낳는자를 상징한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자신을 야생 동물과는 다른 좀 더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로 구분지으면서 미개함을 비웃지만 오히려 자신이 입은 인공 갑각피에 의해 부패되고 있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자 한다.
+신재은
막 _디지털 액자에 영상 (13min), 인조 잔디, 중고 정육용 갈고리_가변설치_2019
막 _디지털 액자에 영상 (13min), 인조 잔디, 중고 정육용 갈고리_가변설치_2019
대지와 염증과 껍질
살은 외피이자 내피다. 살은 표면과 내부 사이에서 외부의 침입과 내부의 이탈을 막으며 끊임없이 유동한다. 신재은에게 이 살은 석유라는 염증을 가진 지구의 지층이 되기도, 부패하는 진액을 흘러내는 동물 사체의 표면으로 치환되기도 하며 온갖 감각지의 층위를 내뿜어낸다. 이 글은 신재은의 최근 개인전 <CRUSTAISM>(2019)을 중심으로 작가의 과거 작품들을 소환하며 그의 작업적 맥락과 접근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전에 부평문화재단에서 선보였던 <가이아, 토끼가 뛰는 언덕>(2018)에 등장하는 스크린 속 토끼는 상호학습과 트렌드에 순응하는 미술계를 우회하는 상징으로 작동했다. 복사기가 끊임없이 토해내는 토끼 이미지는 그 해의 디자인 트렌드 요소를 합쳐놓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토끼는 이번 개인전 <CRUSTAISM>(2019)에서 피와 살을 가진 그 실체를 드러낸다.
막 _디지털 액자에 영상 (13min), 인조 잔디, 중고 정육용 갈고리_가변설치_2019
작업실 바퀴벌레, 전시 오픈 당일 도축된 돼지, 모란시장에서 구입한 살가죽이 벗겨진 토끼까지. 작가 신재은이 작업으로 담아내는 장면들에는 이따금 진짜 살아있던 것이 소환된다. 작가가 만들어낸 단어인 ‘갑각주의’라는 뜻을 가진 플레이스막 인천(PLACEMAK INCHEON)에서의 개인전 <CRUSTAISM>에는 가죽이 벗겨져 귀도, 눈도, 꼬리도 사라진 토끼 여섯 마리가 등장했다. 전시장 1층에는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가 굴로 들어가기 전 손짓하는 영상이 루프 된다. 그 손짓을 따라 전시장을 들어가면 작가가 폐업한 정육점에서 구입한 갈고리에 꿰어진 인조잔디가 토끼굴로 갈음되어 관람자의 동선을 제한한다. 인공적인 잔디를 정육에 꽂던 갈고리로 들어 올리는 일은 쉬이 들여다 볼 수 없는 땅의 밑뿐만 아니라, 욕망의 기저, 인간중심주의적인 프레임의 이면을 동시에 내포한다. 요컨대, 사회적 살로 여겨지기도 하는 인조잔디 밑을 지난다는 것은 평소에 인지하기 어려운 이면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막 _디지털 액자에 영상 (13min), 인조 잔디, 중고 정육용 갈고리_가변설치_2019_1F
시들지 않는 동산 _ 토끼육, 투명 레진, 자동분사기, 숲속 향 방향제_가변설치_ 2019_2F
그러나 땅 밑의 토끼굴로 들어갔음에도 그 다음 동선은 수직으로 상승하는 구조를 갖는다. 전시장 2층에는 윤기가 돌고, 매끈하게 반짝이고, 수백 번의 다듬는 과정을 통해 맑고 투명해진 크리스탈 레진이 부패가 진행 중인 토끼를 두껍게 감싸고 있다. 한 번의 도약과 착지의 능선을 그리며 매달린 토끼의 살을 감싼 레진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진득거리고 물컹거리는 물성이다. 그것은 사체로부터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진액과 분비물이다. 그것은 냄새다. 눈에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부패의 시간은 진액이 조용히 만들어내는 균열을 따라 밖으로 흘러나온다. 이미 수십 번의 틈을 레진으로 덧대고 갈아내어 당장의 균열은 없는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 부패의 시간성이 함께 멈춰버린 것은 아니다. 이때 실제의 살을 크리스탈 레진이 가려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람자의 후각을 덮는 향이 전시장에 분사된다. ‘숲속 향’이 담긴 자동분사기가 한껏 솟은 인조잔디 능선의 위치와 맞물려 두 겹의 레이어로 강력한 인공 향을 내뿜는다. 그럼에도 그 사이에 간간히 부패의 냄새가 스민다. 결국 관람자가 보거나 맡을 수 있는 것은 가장 외부에 놓인 표면의 마감에 그칠 수 없다. 관람자는 결국에는 내부를 보고, 맡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전시장에서 숨을 들이키는 일을 멈추지 못하듯 관람자를 작품으로 깊숙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갖는다.
시들지 않는 동산 _ 토끼육, 투명 레진, 자동분사기, 숲속 향 방향제_가변설치_ 2019
작가에게 어째서 꼭 진짜 동물의 사체를 사용했어야 했는지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진짜여야만 한다.”고 말했다. 물컹한 속성은 재현이 불가능하고, 이 모든 것은 실제 상황이기 때문이다. 토끼의 살은 진짜다. 토끼의 형체를 가진 크리스탈 레진은 진짜가 아니다. 부패의 냄새는 진짜다. 숲속 향은 진짜가 아니다. 진짜는 어째서 진짜가 아닌 것으로 온통 뒤덮여 있는가? 또한 진짜의 상태는 어째서 항상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속성을 갖고 있는가? 신재은의 작품에서 제어할 수 없는 ‘진짜’의 성질은 전적으로 통제 가능한 인공물의 물성과 뒤섞여 조형성을 획득한다. 오브제 자체가 지닌 수행적 성격과 실제를 추구하는 작가의 어법은 작품 안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작가가 그간 전시를 통해 작품을 보일 때마다 선택했던 장치에는 관람의 동선과 배치의 순서가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를테면 토끼굴을 통과해야만 마주할 수 있는 숲속 향 가득한 토끼의 공간이라던가, 토끼가 마치 1층의 인조잔디 능선을 넘어가는 듯한 배치, 이전 작품 <침묵의 탑 pink>(2018)의 미니어처와 지각의 염증으로 해석되는 <Black Fountain>(2019)의 내러티브는 작가의 맥락 안에서 유기적으로 그 개연성을 설파한다.
시들지 않는 동산 _ 토끼육, 투명 레진, 자동분사기, 숲속 향 방향제_가변설치_ 2019
그렇다면 이토록 연출되고 통제된 상황이 주는 연극적 성격과 ‘진짜’가 무대 위에 놓이는 순간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규명되는 것일까. 즉 신재은이 지속적으로 충돌시키는 상반된 가치, 이를테면 허구성과 실제성, 고체성과 유동성, 인위성과 자연성, 매끈한 물성과 축축하고 진득거리는 비체성은 어떤 갈등을 유발시키는가. 어쩌면 이것은 신재은이 갖고 있는 미학적이고도 정치적인 태도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작가는 ‘믿고 있는 진실 같은 것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즉각적이고도 동물적인 반응’이라고 응답한 바 있다. 이는 개념을 설정하고 제작에 들어가는 수순이 아닌,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고 그 촉지각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법을 역추적 하는 작가의 창작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 거시적 개념이나 트렌드를 향해 헌사하는 허구적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감각의 상황을 충실히 실현해내는 것에 집중한다. 감각의 상황을 감지하는 순간부터 그 현장-전시장-에 있는 존재들의 정동에 진동이 생겨난다. 돼지가 깔린 채 아스콘으로 덮힌 흙(<침묵의 탑 pink>(2018)), 23호 파운데이션을 덧입는 삼겹살(<a week>(2018)), 레진을 올린 토끼의 사체(<시들지 않는 동산>(2019))처럼 이렇게 신재은의 껍질은 외피의 클리셰를 입음으로써 동시에 제시된 프레임을 탈주한다. 염증이 이 모든 껍질을 뚫고 터져 나오기를 기대하듯 말이다.
박수지 (큐레이터 / AGENCY R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