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불의 길잡이 / 그을린 불에 깃든 함가
부채로 안개를 내 몰수 없듯이 그을린 불은 내가 여태껏 이뤄낸 수없이 반복되기만 한 그을림과 진화의 결과물들을 모은 전시이다. 옛 방식의 문신을 새긴 이후로부터 생긴 강박이 행동의 무게를 바꿔놓았고 물질의 외양보다 실체에 더 집착하게 되었다. 작품의 주된 기능을 실체의 상징화라 여기고 이를 위한 형식을 기호를 통해 관계를 맺어 주는 것으로 여기며 작업을 해왔다. 옛 문명의 신화적 기호나 원시부족의 문신 행위에서부터 시작된 것에서부터 근대의 패션화된 타투 이미지까지, 그리고 소위 말하는 서브컬처를 관통하고 있는 원초적 이미지들을 기호로 해석해 보면서 이 기호들이 관계를 맺는 여러 세계관을 구축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나의 기호들은 내 몸의 문신처럼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 세계관’을 먼저 표방하고 있고 만들어진 결과물들은 이후에 내가 성장하고 도태하는 길에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다.
‘마오리족의 문신은 단지 피부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또한 정신 속에 종족의 모든 전통과 사상을 심어 놓은 것이다’ ( 구조인류학 I )
상징물들은 기호를 영속적인 것이 되게 하고, 성숙한 작업 행위는 예술을 넘어선 어떠한 상징으로써 세상과 관계를 맺어 오랜 기간 우리의 전통과 사상을 역사에 남겨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을려 있지만 꺼지진 않는 그런 불씨의 길을 찾아 나가고싶다.
눈먼 군상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102x144cm_2012
추억보정의 진경#1 천년을 흐르는 사랑_캔버스에 수채_63x73cm_2014
추억 보정의 진경, 초상
나는 주로 서브컬처라고 불리는 게임, 영화 제작에서 발전하고 있는 미술에 관심이 많으며, 이러한 문화산업에서 생산되는 작품들에 심취해 있는 ‘긱’(Geek) 인류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미술과 내가 즐겼던 서브컬처들 간의 융복합 지점을 찾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이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의 맥락으로, 원류가 된 가상 혹은 관념 속에서 탄생한 세계에 새로운 기원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이고, 넘어서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 실재(hyperréel)를 구현하고 산출하고자 하는 과정이다.
‘추억 보정의 진경’이란 주제의 드로잉 이미지는 기억 속에서 오랜 기간을 거치며 되새김질 되는 과정에서 단순 미화와 동시에 일종의 돌연변이도 일어나고 있다. 작업에서는 서브컬처 세상들이 함께하며 나의 일련의 ‘덕질’ 과정을 통해 머릿속에 자리 잡은 환상이 실제 내가 발 딛고 사는 물리적 세상에 얼마나 혹은 어떻게 실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고대 원주민들의 문신 tattau의 도안 제작에서 시작하여 기호학을 다루면서 판타지와 파생 실재 간의 차이를 구분하고자 하였고,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 속 풍경을 이미지로 다루면서 진경 이란 형이상학적 이미지를 쫓고 있는 것인지 그저 경도되어 2~5차 창작의 시뮬라시옹 산출 과정에만 묶여 있는지를 구분해 나가고 있는 상태이다.
Neo Omnic_종이에 유성잉크_65x80cm_2016
추억보정의 진경#2 판다리아의 파수꾼들_종이에 수채_112x78cm_2016
산업화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고 도시의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현대사회는 전통적 공동체가 급속도로 붕괴되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고독한 군중의 사회’가 되었다. 특히, 일본사회에서는 ‘오타쿠’로 총칭되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PC, SF, 특수촬영, 피규어, 그 밖에 서로 깊이 연관된 일군의 서브 컬처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오타쿠'는 단순히 젊은이들의 마이너한 문화가 아니라, 40-50대 연령까지 아우르고 지역적으로는 아시아 전체로 넓게 퍼져 아시아 서브 컬처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아즈마 히로키, 17-18쪽)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셀 마페졸리는 이들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취향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새로운 문화부족의 사회를 형성하는 '신인류주의(Neotribalism)'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들은 육체의 숭배, 이미지의 범람, 감성의 격앙 등과 같은 세속적이고 찰나적이며 피상적인 표면을 중시하는 현실에 무게를 둔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 ‘찬란한 순간’들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미셀 마페졸리(Michel Maffesoli),140-145쪽)
이산의 인물상의 표면에는 문양들이 음각으로 새겨져있다. 문양은 살로서 피부를 파고 들어간 형국이다. 겉껍데기, 표면, 외양의 세계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실체다. 외양의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면서 유행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마페졸리는 이 유행의 논리 속에 있는 외양적인 것이 임시적으로만 보편적인 것으로, 내일이면 또 다른 것이 보편적인 것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바로 다양한 변조 아래에 있는 ‘외양의 비극’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외양은 그 운명의 제법 중대한, 하지만 대단히 일시적인 지지대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순간은 강렬하지만 덧없다고 탄식했다. 이산은 이렇듯 외양으로부터 가면의 사회학을 도출해 내고 있다. (미셀 마페졸리, 151쪽)
이산이 만든 군상들은 ‘심성의 변형(마구니)’과 싸우고 있는 형상이다. ‘마구니’는 보통 불교에서 ‘마(魔)’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체의 장애를 말한다. 이 ‘마구니’는 내적으로 볼 때 마음속의 온갖 욕망(탐욕,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번뇌를 의미한다. 외적으로는 마음 수행을 직접적으로 방해하는 잡신들을 의미하는데, 두려움을 주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신들, 그리고 일이 너무 안 되는 고난이나 파행 등의 ‘역경’, 또는 일이 너무 잘되고 편해서 수행할 마음이 나지 않는 ‘순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결국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마구니’로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획 가능했던 근대가 지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좀 더 복잡해지고 예측 불가능해졌다. 마페졸리의 말처럼, 포스트모더니티와 이 근대성이 마주하면서 프리모던 (전근대성)이 다시 회귀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산의 ‘초인’은 니체가 말하는 낭만주의적 ‘초인’을 넘어서 전 근대의 세계들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실재하지 않은 ‘유령 같은’ 존재로서 ‘초인’이며 끝없이 가면을 고쳐 쓰는 작가의 욕망이 투영된 ‘아바타’ 같은 존재로 가상적이다. 우리는 이 가상하는 세계가 삶을 어떻게 침식하며 변형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는 상태로 ‘바츠혁명’과 같은 사이버스페이스 상의 사건을 꿈처럼 흘려보내고 있다.
신인류주의(Neotribalism)를 위한 초인(Üermensch)
백기영(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Xe'Ra_vr 드로잉_루프영상_2018
판다리아에서 온 수호자들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240x90cm_2023
추억보정의 진경#3 Big O_종이에 유성 잉크_88x120cm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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