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인간은 자신의 몸을 노동에 평생 바쳐야 할 사명을 안고 태어났다. 그리고 각 시대의 윤리와 종교는 그로 하여금 단순한 생존의 범위를 넘어서, 독자적인 목적과 성취를 낳게 하는 정신을 부여해 주었다. 나아가 이 정신은 사람을 움직이는 내면의 동기이자 목적이 될 수 있는 숭고함까지 안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의 노동정신은 어떤 동기와 종착지를 갖고 있을까.
근현대 산업화시대, 한국에서도 '더 많은 노동이 더 많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직업적 소명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있었다. 이 정신의 내용은 직업에 소명을 부여하는 외부세계와 내부의 동일성(identity)이자, 노동을 반복할 수 있게 해주는 신의(fidelity)이었다. 나아가 이 노동 안에서의 정체성(identity)과 세계에 대한 충실성(fidelity)은 성취를 낳는 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나고 이 정신의 내용은 고갈되었다. 자발적으로 새로운 일을 만들어야 하는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성질은 가변성, 변이성, 유연성이다. 이전의 견고하고 단단한 정체성은 노동이 증식하는 신자유주의시대에서 도태된다. 새로움이 가득한 곳에서 정체성은 오직 타자와 구별될 수 있는 개별적인 특이성을 의미할 뿐이다.
이처럼 급격히 변하는 환경에 따라 노동정신 또한 적응하고 변화한다. 종교는 자본으로, 윤리는 자유로, 법은 생산성으로, 정신을 부여하던 것들은 '양'의 초과를 통해 개인에게 유연한 최적화를 요구한다. 새로움의 '양'에 근거한 이 정신은 과거의 어떤 것보다 훨씬 가변적이며 지속적인, 인간을 필요로 한다.
경작_pen on paper_25x36cm_2021
경작_pen on paper_25x36cm_2021
-자동노동기계-
이런 유연한 세계의 명령에 따라 현대사회의 노동주체는 혁신적인 '자동노동기계(automatic-working-machine)'가 된다. 이들은 일을 해야만, 아니 일을 만들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은 끝없이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수치로 다음 성과목표의 기대값을 설정한다. 이렇게 그는 반복되는 수치에 자신의 동기와 목표를 같이 두는 자기모순적인 존재가 된다.
더 많은 생산력을 내야하는 기계에게 시간은 절대적인 기준이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더 많은 '할 수 있는 일'을 끝없이 만든다. 심지어 그들은 휴식시간 조차 자기 업데이트라는 노동의 연속에 내어주는, 자기 자신의 착취자이자 피착취자가 되버린다. 그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윤활유는 긍정성으로 도배된 사회매커니즘이며, 연료는 성과의 반복이다. 그리고 사회의 유기적인 데이터의 재생산은 이 기계가 매번 더 높은 기대값에 다다를 수 있는 도록 주기적인 소프트웨어의 업데이트, 버그의 패치를 제공해준다. 자동노동기계는 점차 창조노동에 최적화된다.
경작_pen on paper_25x36cm_2021
경작_pen on paper_25x36cm_2021
-정지 그리고 수확-
자기 윤회에 갇힌 기계는 노동 안에서 욕망하기를 포기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노동 안이 아닌 바깥에서 충족시킨다. 외부에서 끝없이 재생산 되는 욕망세계에 기계는 죄(빚)의 리스트를 스스로 작성한다. 그리고 이 기계는 자신이 만든 죄의 죄(빚)사함을 위해 일한다. 즉 그의 노동은 수확을 위한 것이 아닌, 죄사함을 위한 고해성사일 뿐이다.
이런 죄의식에 갇힌 기계는 어떤 결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완결된 결말, 일의 끝은 성취감보다 불안감과 오류를 안겨준다. 그들은 일을 멈추는 순간 몰려드는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정지, 휴지, 단절되는 것들을 죽음으로 여긴다. 그들이 멈추는 순간은 오직 물리적 한계에 소진되고 고갈된 상태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완결을 만드는 것은 생명의 연장을 의미한다. 이 정지는 모든 움직임에 휴지를 부여하고 자기를 목적없는 반복속에서 건져낸다. 이 멈춤은 일과 자아 사이의 거리를 관조할 수 있도록 하며, 신의를 헤아릴 시간을 만들어낸다. 즉 '할수 있음'이란 가능성에 갇힌 열린 결말과 달리 의도적으로 끝내는 결말은 수확의 적기를 만들어 낸다.
경작_pen on paper_25x36cm_2021
경작_pen on paper_25x36cm_2021
-추수-
현경훈의 ‘cultivation’전은 우리 시대에 변이되는 노동과 정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가 보여주는 퍼포먼스 ‘경작’ 은 전시공간을 토지로 개념화시키고 그 위에 기하학적 밭을 가꾸는 과정인데 이는 메타버스의 임의적 설정과 같은 놀이이다. 토지 위에 수치화되고 반복되는 기호는 노동이라는 매개를 통해 물질세계와 우리 내면의 간극을 관통한다. 특히 여기서 설정된 규칙과 패턴은 작가 개인의 공상을 넘어 강박적인 반복노동을 이끌어내는 메커니즘이 있다. 정해진 회로 안에서 돌고 도는 패널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로 치닫을 운명이다. 이런 선견은 작가 또한 기계라는 정체성에 갇혀버린 상황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부의 경작이 추수를 위한 것이듯, 우리의 노동 또한 수확을 맞이해야 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는 ‘일’과 수확의 본질은 ‘가능성-역설에 갇힌 반복’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지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cultivation-경작’전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작가의 노동 뿐만 아니라 그가 스스로 만드는 수확의 조건이다.
이 수확은 우리 앞에 휴지를 부여함으로서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모든 반복회로를 끊어버리고, 해체시키는 이 사건은 거둬야 할 때를 스스로 만드는 결말이다. 작가가 열심히 일군 토지는 무한한 반복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 더 나은 시작을 알리는 순환의 파편으로써 남아 있을 것이다.
#2_애니메이션 스틸컷_2020
#3_애니메이션 스틸컷_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