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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이방인, 절망감 

 

세상은 항상 나에게 무관심했다. 나는 늘 무명작가였다. 전시장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팔릴 만한 작업을 하라고 조언했지만 결국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만이 거의 유일한 나의 팬이었다. 다행히 2008년에 서울시립미술관의 지원금을 받아 디지털합성사진으로 첫 개인전을 열고 다음해엔 국립현대미술관의 창동스튜디오에도 들어갔지만 더 이상의 좋은 소식은 없었다. 2010년,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각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머리의 실루엣이 사라진 곳에 곤충 모양의 헬멧이 드러났다. 내 몸이 사라진 빈 자리에 유년기의 두려움이 채워지고, 상징이 기법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때의 내 조각들도 정말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 이놈의 괴랄한 미적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까닭인지, 슬프게도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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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ker Project 2020_video_06min45sec_2020

 

 

2013년, 독일에서 내 인생의 두 번째 장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독일어를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종종 오해받는 외부인의 절망감”을 퍼포먼스나 영상, 조각 등 여러가지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이방인이라는 불편한 기분이야말로 내 작업방식을 바꿔버린 가장 큰 촉매제였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겁이 많아졌다. 전혀 다른 언어와 관습, 그로 인한 편견 등등은 항상 나를 낯선 사람으로 비추었고 지금도 여전히 형편없는 독일어 실력 때문에 늘 좌절감을 느낀다.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외부로 충분히 분출되지 못한 나머지 생각들은 머리속에 남아서 절망감이라는 이름으로 서서히 굳어지곤 한다. 그 절망감이 이젠 원래의 내 마음보다 더 두꺼워지고 더 무거워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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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수준만큼이나 작업수준도 확 낮아졌다. 정교한 기술이나 다루기 힘든 재료들은 버리고 종이 박스를 자르고 붙인다거나 풍선을 분다거나 스타킹을 뒤집어썼다. 내 의상들은 얼핏 보면 위험하고 공격적이지만, 사실은 꽤나 예민하고 슬픈 구석이 있다. 나는 나와 내 의상 모두 “독일사회 속의 변종들”이라고 믿는다. 내 의상들이 골판지, 스타킹 혹은 풍선 등 쓰레기나 싸구려 제품들로 만들어진 것은, 독일에서의 나란 사람이 사실상 쓸모없거나 불완전한 존재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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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자기자신이 입과 귀가 막힌 외부인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건 참으로 슬픈 경험이다. 대신 퍼포먼스와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로 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영상작업의 주인공들은 나처럼 말하지 못하고 눈빛, 몸짓, 소리 아니면 신체적 변형을 통해 대부분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들은 얼굴을 가린 채 마스크 너머로 나를 쏘아본다. 그들은 테이블을 노크하고, 신경질적인 휘슬소리를 내지른다. 그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터질 듯 그들의 머리는 위태롭게 팽창하고 있다!

 

나는 혀를 잃고 스트레스를 얻었다. 그들은 기술을 잃고 감정을 얻었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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