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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진짜는 있고 가짜는 없지’ 전을 통해 예술을 하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아이러니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최황의 메시지를 한 번 따라가 볼까요?

 

당신은 첫 번째 문을 통과해 지금 이 종이를 손에 넣으셨을 겁니다. 작가는 작품 ‘에듀케이티드 관객, 2023’을 넘어선 관객의 행위를 통해 “이로써 ‘관람객’이었던 당신은 ‘교육받은 관람객’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미술관의 어느 관람객에게서 우연히 듣게 된 말입니다. “아유, 공부하러 온 것 같아서 머리 아프니까 빨리 나가서 차나 마시자.”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말한 이를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마르셀 뒤샹이 남자 소변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샘’이라고 부른 이후부터 전시장에 놓이는 작품들은 대체로 ‘에듀케이티드 관객’이어야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미술을 공부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작품들의 비율이 더 커진 거죠. 언에듀케이디드 관객은 도슨트나 오디오가이드로부터 교육을 받아야만 작품과 소통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합니다.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 수고와 여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합니다.

 

저는 “문지방을 밟으면 복 달아난다”하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라는 찰스 부코스키의 시처럼 예술은 매력적이라 끊임없는 성찰의 기회도 주는 반면 성찰하는 과정의 괴로움도 줍니다. 이 글도 당신을 제 방식대로 교육하려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작가는 쉬운 언어와 어려운 언어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미술 하는 사람들도 사실 다 알고 있어요. 미술과 관련된 글들이 얼마나 폐쇄적인지를요. 가끔은 ‘보그 병신체’니 하는 자조 섞인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념화 되어있는 언어를 써야지만 얻을 수 있는 깊이도 단연 있습니다. 다만 굳이 어려울 필요는 없죠. 감이 온 것 같다면 이 글은 나중에 읽으시거나 아예 안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이것은 작가와 함께 전시를 만든 기획자의 풀이지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있지만 오답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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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성분 분석_혼합재료_가변설치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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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_지구본_26*28*33cm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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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형 좌대 위에 놓인 각각의 샘플 병 속에는 작가가 분석한 전시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작품 ‘전시 성분 분석, 2023’의 그림자는 ‘태도, 2023’를 향하고 있습니다. 테이블에 놓여있어야 하는 지구본은 마치 남자 소변기처럼 벽에 걸려 있습니다. 작가는 회전축을 고정하기 위한 지구본 표면의 구멍 때문에 볼 수 없는 북극을 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축을 어디로 낼지 고민하던 작가는 구 지름의 양 대점에 아무 정보도 없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는 양쪽이 모두 바다인 곳으로 지구의 축을 재설정하였습니다. 작가는 지구본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남북의 분단을 상징하는 38선 덕분에 한국의 위도가 38도쯤이라는 것을 내내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국의 날씨로 미루어 비슷한 위도 선상의 지역들이 비슷한 기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해안 지역이 같은 위도에 있다는 사실이나 히말라야산맥이 한국보다 훨씬 남쪽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알게 된다. 방콕은 내가 가본 곳 중 적도에 가장 가까웠고 내가 가본 곳 중 가장 더웠다. 그렇게 적도를 기준으로 한 바퀴 돌아보다 다시 새로운 사실들을 확인하게 된다. 남반구로 묶어 생각하던 남미 몇 국가들은 북반구에 있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적도 부근이라 할 수 있는 영역은 전체에 비해 극히 일부라는 사실이다. 세계 지도를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도통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렇게 가끔 세계 지도를 살펴보면 스스로 얼마나 북반구 중심적으로 사고하는지, 나아가 북위 38도의 한국이 얼마나 사고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태도’는 2018년 작가가 길을 걷다 버려진 물건 사이에서 발견한 지구본입니다. 받침대가 원목이라 마음에 들었다는 작가는 집으로 지구본을 가져갔습니다. 작가는 거실 테이블 위에 지구본을 장식용으로 올려두었는데 며칠 못가 다시 버릴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작가의 집에서는 지구본이 너무 커서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이죠. 작가는 생각했습니다. “아, 이 지구본이 내 작품들 크기의 기준이 되면 되겠구나.” 작가의 작업적 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고 작품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 준 상징물의 축을 바꾸면서 작가는 다시 한번 그 자리를 확인하고 대립한 지점을 확인한 듯합니다.

 

두 번째 방으로 가겠습니다. 이 방은 ‘삼지점, 2023’이라는 작품입니다. 작품 안에서 작가는 최근 영상작품 ‘진경산수, 2023’를 상영합니다. 미술관에서 영상작품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 말에 얼마나 동의하시나요? 입구와 출구가 같아서 이동 방향이 교차하는 사람들에게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재생 시간이 긴 영상 자체를 보고 앉아 있을 시간적 여유도 없고, 긴 재생 시간 동안 시청하기 어려운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또 영상 작품이 시작하는 시간을 맞추기란 영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죠. 더 재미있는 모순은 앞서 말한 ‘에듀케이티드 관객’의 경우가 더 빨리 자리를 뜬다는 썰도 있습니다. 에듀케이티드 관객은 뭐든 딱 보면 알 수 있는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코드가 작동하고 있는 걸까요? 본격 연구해 보고 싶은 대목입니다.

 

작가는 한 공립미술관에서 ‘진경산수, 2023’를 상영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미술관은 탁 트인 공간에 거대한 가벽을 세우고 재생 시간이 다소 긴 영상작품들을 순차 상영했습니다. 대안이었는지 벽의 반대편에서는 무선 헤드셋으로 음향을 들을 수 있도록하고 같은 작품들을 순차 상영했죠. 그런데 문제는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요건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기관의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치면서 가장 많은 생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작품의 요건’이었습니다. 화면도, 소리도, 상영 방식도, 작가가 관객들과 만날 때 지키려고 했던 요건을 갖출 수 없었습니다. 최황은 영상작품을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방 ‘삼지점, 2023’을 만들었습니다. ‘삼지점’은 클라이밍을 할 때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귀와 같은 선상에서 세 꼭지점을 이루는 두 대의 스피커 그리고 선명한 화면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최소의 요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진경산수, 2023’는 크게 두 챕터로 나뉜다. 앞부분은 등산의 역사적 토대와 미술사적 레퍼런스를 바탕에 깔고, 산업-경제와 대중문화의 관계를 다양한 푸티지로 엮어 한국 등산 문화의 흐름을 쉽고 유쾌하게 읽어준다. 뒷부분은 환경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데 작가는 정치-경제와 자연이 이루는 대비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입장에 놓여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후반부의 씬들은 작가가 산에 있었던 시간을 보상받듯 산에게 돌려받은 선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작가는 ‘진경산수’를 통해 ‘문제의식’이 아닌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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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2023. 수석, 쇠고리. 25*17*1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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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 상·하_중고책, 무소블랙_10*22*16cm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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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황은 2021년 ‘인터넷산악회’를 결성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등산하기 위한 네트워크이지만 암벽등반가의 입장에서 예술을 향유하기 위한 모양새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 방을 들어서면 세 번째 삼각형이 나옵니다. 삼각형 위에는 쇠고리가 박혀있는 수석 ‘낙원, 2023’과 책 2권 ‘방법 상·하, 2023’가 놓여있습니다. ‘낙원’은 처음으로 등반 루트를 개발한 이가 같은 길을 오를 이들을 위해 암벽에 박아두는 쇠고리입니다. 등반하다가 추락하는 일도 있는데 최대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다가 이 쇠고리에 도달했을 때는 진짜이지 천상의 맛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쇠고리는 어떤 과정의 완료 지점이자 다음 단계의 출발점이고, 그가 사는 집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북한산 인수봉을 오르다 보면 종종 공황 상태에 빠지곤 한다. 수직에 가깝게 뻗은 화강암 벽 중간에서 도저히 발을 떼어 올려 디딜 엄두가 나지도 않는데 그렇다고 다시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다. 추락을 감행하자니 로프를 아직 안전한 곳에 걸어두지도 못했으므로 공포가 정신을 휘감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차분히 오르는 것. 그렇게 한 발, 한 손, 한 발, 한 손씩 암벽을 더듬어 오르는 방법 말고는 그 상태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그렇게 불과 십수 미터를 오르는데 엄청난 체력과 시간을 소비한다.

 

이런 지난한 등반 행위는 사슬로 연결된 앵커 볼트에 내 몸을 확보하면서 일단락된다. 여기서 다음 앵커를 향해 더 오를 것인지 내려갈 것인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쇠붙이는 시작점이자 도착점이다. 등반이 어려울수록, 암벽의 높이가 높을수록 이 쇠붙이가 발휘하는 위력은 커진다. 낙원의 대장간에서 담금질해 만들어졌을 이 사슬을 맨손으로 움켜쥘 때 느껴지는 그 감각, 휘몰아치던 공포가 흩어지는 순간의 안녕. 이 찰나를 위해 등반을 한다고 해도 거짓은 아니지만 죽음으로 곤두박질칠 수 있는 ‘괴취미’를 즐기는 진짜 이유는 이 모든 과정이 ‘작업하기'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간혹 우리는 어떤 대상을 두고 이 예술이 ‘진짜다’, ‘가짜다’를 따지기도 하는데요. 미적 기준이나 미학은 너무나도 사회정치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미적기준은 항상 의심받아야 마땅합니다. 의심은 진짜의 정도를 구분하는 것에 두고 진짜를 만들기 위해 가짜를 발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세 방이 이룬 삼각형은 작업을 할 때 어떻게 현실과의 균형을 맞출지 탐구하는 작가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했습니다. 이제 최황의 삼지점 밖으로 나와볼까요? 플레이스막3의 로비에는 작품 ‘문명, 2023’과 ‘좋은 직업을 선택하는 방법, 2023’이 놓여있습니다. 그는 지난 5월 플레이스막 방콕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한 달 동안 방콕에 머물렀었습니다. 당시 그는 ‘문명’에 대해 평소와 다르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과 다른 언어, 문화, 정치 체제와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었고 그런 자기 모습에 놀란 “객관화된” 인간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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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_종이 패널, 손전등, 마이크 스탠드_가변설치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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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직업을 선택하는 방법_플라스틱 변기, 무소블랙_가변설치_2023

 

 

‘문명’은 문명인의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디자이너가 고안한 파리 모양의 스티커 모양의 드로잉을 포함합니다. 대부분의 남자 화장실에는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지요. 변기 속에 파리 스티커를 붙여놓으면 정말 흘리지 않나요? 가고 싶은 곳을 정확하게 찾은 요즘의 그라피티처럼 파리 스티커 디자인은 화면 안으로 들어와 작품이 되었습니다. 어디부터 파리 스티커이고 드로잉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뭔가 찝찝한 기분을 들게 하는 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은 물 때문일까요? 조준에 실패한 이의 직업은 무엇일까요?

 

작가는 남자 소변기를 처음 디자인한 디자이너를 상상해 봤습니다. 디자인을 한 사람과 뒤샹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작가는 아무래도 뒤샹이 남자 소변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사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뒤샹의 ‘샘’과 똑같은 모양을 한 중국산 플라스틱 변기에 빛 흡수 검정을 칠했습니다. 아니쉬 카푸어라는 작가는 영국의 한 회사가 개발한 빛을 99.965% 흡수하는 검정 안료를 독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최황은 상용화된 99.4%의 빛 흡수 검정을 써서 뒤샹의 영광을 아니쉬 카푸어의 욕망으로 덮어버렸습니다.

 

한 예술가가 독점한 안료에는 못 미치는 수치이지만 최황의 변기에 많은 의미가 교차해 있습니다. 예술이나 예술가의 범주는 넓으면 넓을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 전시의 홍보물을 만드는 디자이너와 작품을 출품하는 작가에게 주어지는 비용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작품보다 부차적인 것에 더 많은 비용이 쓰이는 거죠. 이 내용은 첫 번째 삼각형과 이어집니다. 한 예술가는 왜 특수 안료를 독점해야만 했을까요? 깊이를 표현하는 것이 반드시 색일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작품이긴 합지요. 이 부분은 전시장 내부에 놓인 책으로 된 작품들과 교차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내다가도 현타가 오는 지점은 왜 예술을 그만두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서로 괴로운 척하고, 모르는 척도 해보지만 비효율적이고 무목적적인 예술이라도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아는 사람은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이 종이를 손에 쥐는 순간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너고 만 것일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말대로 뭐 대단한 예술이라고 이렇게도 길게 썼을까 싶습니다. 제 긴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니 이제 ‘낙원’을 생각하시면서 좀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는 각설에 열을 올리겠습니다.

 

기획_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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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케이티드 관객_중고책_가변설치_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