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이 처해 있는 분단 상황이 60년이 넘도록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긴 시간 동안의 분단 때문인지 남북문제에서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해도 나에게는 그다지 심각하게 체감되지 않았고 익숙한 상황으로 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분단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분단 상황을 주제로 하는 미디어 작품제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 10여 년 전쯤 신상옥 영화감독의 안양 스튜디오에서 감독이 북으로 납치되었던 시절 북에서 만든 영화 '사랑 사랑 내사랑' (뮤지컬 춘향전. 1984)을 보고 남한에서 만들었던 춘향전(1961년 최은희 주연) 과는 어떤 관계가 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두 영화는 한국 고전 소설 춘향전을 각본으로 한 영화로 신상옥이라는 영화감독에 의해 남과 북에서 만들어 졌다는 분명한 연결고리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춘향전 이야기에는 흥미가 없었고 두 영화 사이에 내재하는 - 나 역시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관계될 수밖에 없는 - 분단의 문제에 흥미를 느꼈다. 그 중심에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삶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언젠가 나는 이 두 개의 영화를 가지고 분단에 대해 비디오로 작업 해보고 싶었고 지금 남과 북의 경계인 3.8도선에 있는 '판문점 (板門店)' 지명의 첫 글자인 '널빤지판(板)'이라는 제목으로 미디어 전시를 하게 된 것이다.
50초의 렌더링 ● 이 작품은 한국 분단 후 50년 만에 만나는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 장면이다.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의 짧은 해후는, 그들로 하여금 기억의 상처와 현실의 상황 이 교차되면서 무척이나 낯설어하며 혼돈스러워했고, 보여 지는 노인들의 몸짓과 표정들에서도, 그동안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환경과 삶의 흔적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50년이라는 긴 이산의 시간과, 50초라는 짧은 만남이라는 숫자적 의미를 작업의 의도로서 설정했고, 긴 시간의 비디오 편집 과정 속에서 완성된 짧은 비디오 영상 또한, 그 영상이 내포하고 있는 실제적 의미와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두개의그림자 ● 실재 공간에 설치된 두 개의 전구에 반응하는 아이의 이미지 영상이 있다. 이방인의 모습을 한 한국국적의 어린아이의 이미지는 낯설게 보여 진다. 우측에 설치된 전구가 켜지면 그 불빛을 받은 아이의 반쪽 모습이 영상에 나타나고 동시에 아이의 실재 모습이 비춰져서 생성된 것처럼 아이의 검은 그림자 영상이 좌측 화면에 나타난다. 그리고 전구가 꺼지면 두 개의 이미지는 사라진다. 좌측에 설치된 전구가 켜지면 반대로 같은 상황이 재현된다. 두 개의 전구의 불빛에 반응하면서 보여 지던 아이의 그림자 영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의 부모 그림자 영상으로 바뀌어간다. 이렇게 아이 모습의 비디오 이미지(평면적)는 실재 공간의 전구 불빛과 조우하여 그림자를 생성함으로서 입체(실재)인 것처럼 보여 지는 것이다. 다르게 보면 이 아이의 이미지가 실재의 모습이라고 강요하는 것 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작업은 전구의 불빛과 이미지 영상을 시공간을 초월한 동등한 관계로 설정하여 보여줌으로서 우리가 처한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옛날옛적에 판문점 ●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 징용에서 고향 판문점으로 살아 돌아온 유완옥(당시25세)은 고향 할아버지로부터 곧 전쟁이 닥치게 될 터이니 피난처를 찾아 고향(판문점)을 떠나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곳으로 가야만 삶을 도모하고 후손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해방 후 혼돈의 시기 한 복판에 서있던 25살의 젊은 유완옥은 고향 할아버지로 들은 혼란스러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믿게 된다. 그리고 처와 자식을 버리고 얻어먹는 방식으로 십승지(정감록에 나오는10군데의 피난처)를 찾아서 고향을 떠난다. 이 영상은 유완옥 (당시80여세)의 삶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촬영 제작한 단채널 비디오 작업이다. 화면에는 두 인물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삶의 곡절과 판문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실제로는 유완옥 한 사람으로 각기 다른 시간 때에 촬영된 두 모습이다. 그 두 인물은 각자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 같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같거나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신춘향● 신상옥 영화감독이 남과 북에서 만들었던 춘향전 영화 두 편을 가지고 만든 비디오 설치 작업이다. 작품 제목을 신상옥 감독의 성을 따서 신춘향이라고 지었다. 위에 보여지는 이미지처럼 공간 바닥면에 3개의 비디오 스크린을 설치한다. 뒤쪽에 보이는 영상은 북한에서 만든 춘향전이고 맨 앞쪽의 영상은 남한에서 만든 춘향전이다. 중간에 보이는 영상은 38선, 혹은 휴전선으로 설정된 스크린이다. 카메라 렌즈의 거리 초점을 맞추는 형식을 이용한 영상작업으로 맨 뒤쪽 초점이 맞은 북한의 이몽룡 영상에서 앞쪽 남한 춘향이 영상으로 초점을 맞출 때 어쩔수 없이 중간 거리에 있는 스크린에 순간 초점이 맞았다 틀어진다. 그 순간 영상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RGB칵테일-용해되지않는캡슐 ● 빈 잔에 영상을 투사하여 실재로 물이 찬 것처럼 보이게 구현한 작품이다. 두 개의 마주 놓인 칵테일 잔이 있다. 물이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 칵테일 잔 속에는 성분을알지 못하는 두 개의 캡슐이 각각의 잔속에서 잠수함의 어뢰처럼 유영한다. 그것은 회합의 화려한 축배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불길한 징조이다. 그간의 수많은 협상과 대화에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남과 북의 긴장상태가 지속되는 것처럼 캡슐은 용해되지 않고 잔은 비워지지 않는다. ■ 김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