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찬석 단편선
서찬석
2016. 8. 20 - 9. 10
‘난봉’의 미학 - 서찬석 단편선
‘나의작업은 사회혁명, 혹은 치유의 방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불안정함과의 피할 수없는 공생을 인정하며 그 불안정함에 솔직하게 대면하는 방법을 다양한
예술 활동을 통해 찾고 있다.‘(서찬석 작가노트 중)
서찬석_왜 나에게 싸우라고 했습니까_종이에 아크릴,먹_78,5cmx54,5cm_2016
링은 파랗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신경질적으로 내려 그은 갈필의 파란색은 얻어맞은 멍이 축적되어 검은피색을 띄우는, 그리고 밑천이 다 들여다보이는 쌍스러운 욕같이 애처롭기도 하다. 나는 파란색이 불결하다고 혹은 애처롭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서찬석이 그린 이 링은 파랗다. 정확하게 말하면 불길하고도 불온하게 파랗다. 고개를 들고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파란 하늘과 저 시리고도 차가운 바닷물 같던 파란색은 오늘 나에게 너무도 불길하고도 불온한 상상을 갖게 한다. 그리고 링의 주위를 보자. 세상은 노랗다. 2014년이던가? 광주에서 김범의 작업 노란 비명을 들은 이 후 난 노란색이 너무 시끄러운 색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기지촌 같은 삼각지의 셋방을 살던 시절, 노란 모자와 가방을 메고 재잘거리며 떠들던 리라초등학교 아이들이 너무 고급스럽고 귀티가 나서 리라의 노란색은 늘 내겐 선망의 부러운 색이었는데 노란 비명이후 노란색은 너무 시끄러운 색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서찬석의 ‘왜 나에게 싸우라고 했습니까?’를 본 이 후, 온 국민의 슬픔을 상징하고 애도했던 세월호 참사의 노란 리본이 오버랩 된다. 넘어진 선수를 향한 소리없는 아우성이 이럴까? 안타까움과 먹먹한 가슴으로 차마 입으로는 떠들 수 없는 슬픔은 화면을 꼼꼼하게 메우지 못한 노란 스트로크가 된다. 링은 불길하고 주위는 슬프기만한 풍경에서 펀치를 맞고 쓰러진 권투선수는 말한다 “ 묵직한 펀치를 맞은 후 겨우 정신을 차리니 상대선수는 승리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심판은 어서 일어나라며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왜 나에게 싸우라고 했습니까? 의 텍스트)
서찬석_단지 푸른하늘이 보고 싶다_캔버스에 아크릴, 먹_130cmx161.5cm_2016
노오란 노오력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는 더 많은 노력을 하라고 요구한다. 그걸 조롱하는 말이 바로 ‘노오력’이다. ‘망한민국’,‘헬조선’의 가장 결정적인 키워드이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답이 없는 상태인데 그것을 계속 개인의 자질과 태도, 나아가서는 ‘윤리’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채찍질이 ‘노오력’인 것이다. - (노오력의 배신, 조한혜정 염기호 외,창비, 2016 중)
한번 경쟁에서 낙오되면 다시 소생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특히 예술가들에게 체념을 위한 선택의 순간은 매번 존재한다. 파랗게 질린 링 위에서 엎드려 슬프게도 노오란 주위를 보며 ‘노오력’이란 어쩌면 체념과 노력의 경계선이자 탈주선이다. 서찬석은 작가노트에서 ‘나의작업은 사회혁명, 혹은 치유의 방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불안정함과의 피할 수없는 공생을 인정하며 그 불안정함에 솔직하게 대면하는 방법을 다양한 예술 활동을 통해 찾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술(작업)을 통해 삶의 부조리함과 불안정한 텐션을 살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른바 ‘공생’ 과 ‘솔직하게 대면’하는 것으로 마주하는 이는 링 위에 엎드린 바로 ‘서찬석’인 것이다. 이 ‘노오란 노오력’의 한 가운데에서 서찬석의 작업은 영민하지 못한 채로 육덕지게 싸우고 있다.
서찬석_들개가 지나는 자리_종이에 아크릴,먹_109cmx79cm_2016
이젤 위에서 아그리빠를 그려가면서 디자인 된 몸
본디 그림은 보는 것과 그리는 것 사이의 통로에 개입된 개인의 번역 장치가 중요하다. 입력과 출력사이를 관장하는 이 기관은 대체로 개별적으로 학습된 통로로 구조화된다. 입시미술을 경험했거나 미술대학에서 실기수업을 빡세게 받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찰나의 기억들을 연결시켜 도화지나 캔버스에 옮기는 이 과정들은 다분하게도 이성적인 설계와 수행의 과정 안에 있다. 심지어 개인의 표현적 성향을 증폭하여 개성적 언어를 쏟아 내야하는 순간까지, 학습되거나 조작된 미적 가치들이란 이미 정해져있어서 결국 아카데믹이라는 한계를 드러내는 경우를 수없이 목도하게 한다. 화가가 되고 싶은 심정과 노력들은 이 아카데믹한 표현의 순간까지 그리는 기술을 발전시킨다. 그리고는 또한 대부분 그 다음의 통로를 찾지 못하고 안주하거나 포기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13년 대학에서 그림을 지도하고, 또한 미술계 현장에서 자주 마주하는 화가들이 대게 이러했다. 나 역시 이런 저런 연유가 있었지만 그리는 기술이 변변치 않아, 머리를 써보다가 또 이 역시 변변치 않아 결국 몸빵을 선호하는 미술씬에 거주하고 있으니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리고 잘 그린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는 기술 이후의 자기 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이다.
그리는 기술 이후의 자기 기술은 어렵지만 연마가 가능하기는 하다. 결국 이 자기 기술은 보는 방법을 연마하는 것이며, 근육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다. 보는 방법은 화가마다 다 다르다. 어떤 화가는 전방위적으로 다 보는 것이 중요하고, 또 어떤 화가는 아주 미시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며, 매우 천천히 느리게 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고, 순간적으로 시점을 포획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결국 이 보는 방법은 관찰의 속도와 매우 연관성이 있다고 보여 지는데 서찬석의 경우는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장면을 포획하는 자기 기술이 있어 보인다. 이는 사냥꾼의 관찰방식이다. 때문에 서찬석의 보는 법과 그리는 법은 모두 날렵하고 재빠르게 사냥이 성공하는 접점을 향해 있다. 그래서 그리는 근육과 방법이 남다르다. 근육이 남다르다는 것은 화가에게는 하늘이 준 선물일 수 있다. 대체로 이젤 위에서 아그리빠를 그려가면서 고안된 몸들이 수년간 고착되면서 스트로크의 관성을 만들고 이 스트로크의 관성을 고민 없이 받아들인 몸들을 자연 상태로 돌이키기란 쉽지 않다. 이른바 그림의 형식미란 어쩌면 우리가 고안한 미술의 전수 방식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태생적으로 그림은 이렇게 그려야한다고 고안된 최고의 지도방법이 현재에 이르러 그림은 정말 이렇게 그릴 수밖에 없는 몸을 대물리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이젤을 거부했던 많은 화가들은 미술사 안에서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유물이 되었고, 오늘 또 난 미술관에서 혹은 많은 시내의 갤러리에서 그 유물 이상의 감각을 제안하는 그림을 쉽게 목도하지 못한다. 그런데 서찬석의 그림은 묘하게도 다른 근육을 사용하는 흔적과 징후들로 가득 차 있다.
서찬석_엄마의 정원_종이에 아크릴,먹_54.5cmX78.5cm
난봉한 스트로크
나는 가끔 서찬석에게 ‘난봉꾼’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일단 술을 무대뽀로 많이 마시고 껄렁하고 잡스러운 음악을 많이 듣는다. 어쩔 때는 되도 않는 음악을 한다며 동료들과 밴드를 만들어 논다. 이 논다는 표현에 서찬석과 밴드 동료들은 반대할 수 있겠지만, 한물갔다는 대접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나로서는 기를 쓰고 이들이 하고 있는 음악을 젊은 감각으로 최대한 마주하려 해도, 가장 긍정적인 표현이 논다는 표현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이 음악 공연들은 그래서 놀고 있다. 그리고는 춤을 춘다. 그런데 춤이 많이 부끄럽다. 부끄럽게도 다음 동작이 예측 불가능한 이 춤은 허영이 없는 막춤이다. 대체로 예술가들이 모여 있으면 이렇게 껄렁하게 노는 폼세가 비슷비슷한 무리가 많이 있었으니 서찬석도 기본적으로 음주가무에 최적화된 몸을 갖고 있는 작가이다. 그리고는 주사도 그럭저럭 갖추었다. 술 먹고 싸움걸기처럼 쉬운게 또 있겠냐만은 우기기와 욕하기, 무시하기와 비꼬기는 기본으로 하고 또 가끔은 주먹다짐도 한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밀당을 잘한다. 서찬석의 섹드립은 느끼함과 귀여움의 인과관계를 추적하게 한다. 요즘 유행하는 잘 터지는 아재 개그와 비슷하다. 그냥 우리가 아는 ‘난봉’에 적합하다.
그런데 이 ‘난봉’은 어쩐지 조금 올드한 패션이다. 대한민국이 압축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루고, 문명의 DNA가 고등교육에 걸 맞는 사교성을 지배하고 있는 요즘 ‘난봉’은 참으로 당황스러운 근대의 산물이다. 대체로 오른쪽 뇌가 비대하여 감성적 수치가 높은 사람이 이 ‘난봉’형 인간에 가깝다. 미국의 뇌 과학자 ‘로저스페리’의 이론을 빌리면, 몸을 움직여 오른쪽 뇌를 자극하고, 이 때 활성화되는 우뇌의 역할중 하나는 비합리적 비역사적 비논리적인 야생적 사고를 촉발하는 것인데 이는 ‘레비스트로스’의 주장대로라면 미개인(근대적인)의 사고가 아니라 어떤 기호를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공리와 공주의 체계를 말한다. 말하자면 지금은 미개한 근대적 ‘난봉’에 익숙한 몸이 결국은 신화적 사고와 구체의 논리로 표현되는 감각으로 귀속되는데 어이없게도 서찬석은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난봉’이 그리는 기술의 자기 기술적 장치로 작동되고 있다. 이른바 비트(beat)를 밀고 쪼개면서 자유롭게 리듬을 끌고 다니는 노래처럼, 춤처럼, 서찬석이 구사하고 있는 회화의 스트로크들이 이 모양인 셈이다. 그래서 서찬석의 그림은 스트로크로 꽉 차있다. 대체로 그림을 그려본 사람들은 다 안다. 마주한 평면에 붓질을 할 때 쉬어가는 붓질들이 있다. 배경을 메우기 위해서도 그렇고 톤을 만들기 위해서, 때로는 숨을 쉬기 위해서, 오죽하면 여백의 미학이 당당하게 존재하고 있는 지점에서 보듯이 회화의 붓질은 모두가 빡빡하게 화면을 메우고 있지는 않는다. 그런데 서찬석의 붓질은 조금 다르다. 원샷 원킬의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붓질을 한다. 이 역시 사냥의 메카니즘과 비슷하거나 도정의 기술과 비슷하다. 한 번의 화살이 과녁을 뚫거나 한 번의 칼질이 고기의 원하는 부위를 도려내는, 때로는 크게 갈비뼈를 도려내고 때로는 작게 살점 하나를 떼어내는 방식이랄까? 버릴 것이 없는 어깨의 휘두름은 척추에서 보내는 신호를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의 생각을 무쳐 가볍지만 정확하게 손끝에 전달한다. 활이 시위를 벗어나는 순간, 손끝의 갈등까지 긴장된 촉수로 연결되어 있는 근육의 연마 기술은 아마도 이 ‘난봉’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서찬석_우리의 사랑은 푸르른 풀과 같아요_캔버스에 아크릴_72cmx92cm_2016
언프리티 페인터
서찬석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섹스와 종교적 제스처, 신화적 꼴라쥬와 서사성, 느닷없이 등장하는 일상적 아이콘들의 연결고리가 ‘난봉’의 기술에 의한 인과관계라면, 이는 앞서 인용한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밝힌 ‘브리꼴레르’bricoleur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서찬석이 ‘단편선’이라고 이름 붙인 이 전시는 포획된 사건의 세계를 신화화 한 후 해체시키고, 이 해체된 단편들이 모여 다시 새로운 세계를 이루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포획된 사건을 가지고 서찬석이 첫 번째로 취하는 실제적 조치는 돌이켜 생각해 보는 일이다. 우선 그가 가진 도구나 소재들의 집합이 무엇 무엇인가 새삼 검토하면서 그의 당면문제를 그 재료(소재)의 집합이 해결해줄 가능성이 있는지 그 하나하나에 일일이 일종의 대화를 나누고 나서 최종적으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이런 재료들의 ‘이항대립’적 구도가 많이 나타난다. 그것은 신화의 체계를 갖춘 사건의 방법론과 유사한데 무의식적이면서 다양한 모든 구체적인 사물, 즉 시각 미각 촉각 후각 등 어떤 감각이 포착된 사실이거나 경험을 모두 대립과 대칭의 구도 속으로 배치한다. 이제는 촌스러워서 한물간 뽐내기로 뽐내는 방식에 웃음이 터진다. 이 역시 근대적 감각의 재해석이다. 뻔뻔한 ‘난봉’적 전략이다. 하지만 이 ‘난봉’적 전략에 글러브를 끼고 잽을 휘두르던 감각이 배치되지 않았다면 그냥 촌스러운 그림이 될 여지가 충분하다. 샌드백을 조금 쳐본 감각, 숨을 헐떡이면서 링 위에서 상대방의 발놀림을 잡아본 감각, 묵직하게 들어오는 타자의 펀치를 맞아본 감각이 서찬석의 붓질에 영민하게 작동된다. 이상하다. 육덕지면서 세련되어지고 있다. 권투 글러브를 낀 채로 붓질을 하면 이럴 수 있을까? 불길하고 슬프고 불편하기만한 농담 속의 진실 같은 이 느낌의 정체에서 나는 언프리티 랩스타를 본다.
서찬석_서찬석 단편선_단채널비디오_2016
‘난봉’의 미학
회화의 자기 기술을 타고난 화가가 부럽다. 태생적인 성질이 그러한데 어떻게 그를 이길 수 있을까? 하지만 암묵지의 자기 기술을 발견하고 연마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손 끝에 힘을 빼고 균등한 붓질로 화면을 마주 하는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나는 안다. 이 즈음이면 산전수전 공중전 정도의 맷집을 가지고 화면과 싸워봐야 가능한 일이다. 서찬석은 이제 화면과 싸우는데 어느 정도 이력이 붙은 모양이다. 힘을 빼야 오래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유연함이 보인다. 아마 내가 서찬석의 그림에서 육덕지면서 세련됨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일 듯하다. 이제 서찬석은 ‘난봉꾼’아티스트에서 ‘난봉’의 미학을 탑재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이것이 진화인지 퇴보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난 지금 서찬석의 그림이 매우 좋다.
■ 김월식 ( 작가, 무늬만커뮤니티 )
서찬석_We have no HERo_판넬에 아크릴, 먹_112.2cmx145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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