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쯤이였다. 하용주 작가와 함께한 그룹으로 진행된 기획전시의 철수 날 뒷풀이를 향할 때, 내 손에는 가스마스크 시리즈 초기의 작품인 ‘전환점‘ 이 들려 있었다. 전시를 끝낸 작품이였고, 작가 본인이 들고 가겠다고 했지만, 무슨 고집이었는지 굳이 내가 들겠다며 다음 술자리로 이동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는 취중에 계속 탐나는 작품이라고 어필했다. 삶의 영위가 우선이였기에 수중 몇십만원을 내놓지 못한게 지금도 후회스럽다. 물론 구매하기에도 부족한 금액이였지만, 액수의 문제라기보단 그저 작품을 곁에 두지 못한게 아쉬울 뿐이다.
이후 하용주 작가는 작가로서, 나는 아트디렉터로서 십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의 ‘플레이스막’에서 전시로서 함께 호흡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지인의 전시를 기획함에 있어 완전히 영글지 못한 하수의 내공을 지니고 있기에, 1년전 용주의 제안에 마음속으로 흔쾌히 응하지 못했다. 크고 세련된 공간에서 펼쳐졌던 이전의 전시들이 너무 훌륭하고 내 맘에 들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오점이 남진 않을까 하는 우려와, 아트디렉터로서가 아닌 작가의 팬으로서 설레이는 들뜸이 전시를 만들어감에 방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와중에 플레이스막은 불가항력인 상황으로 전시공간은 이사를 해야 했고, 이후 잡힌 하용주 작가의 전시는 작가가 직접 공간을 눈으로 관찰하지 못한 상황에서 진행 되어야 했다. 이런 불편을 제공하는 갤러리라니, 처음 염려한 지인이라는 이유가 무거웠다. 염치없고, 미안했다. 현재 이 글은 전시전이 아니라, 전시중에 쓰는 글이다.
전시의 오프닝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전시 막바지에 들은 평들은 새삼 고마울 뿐이다.
처음 이 글은 전시와 작품을 설명하는 서문의 기능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 설명으로 전시장내 비치된 짧은 작가노트와 큐레이터의 글이 충분하다 느껴, 글의 중심을 일반적인 전시서문의 기능이 아닌 유디렉이 보내는 하용주작가 전상서의 마음으로 써내려가 보려한다. 전상서는 사전적으로 웃어른께 향함이 있으나, 나이의 순서를 떠나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충분한 귀감이 되었기에 전상서라는 뜻을 담아 보려 한다.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재미났던 것은 작가자신의 단점을 표현할 때였다. 실제 작가는 말을 빨리 하려다 입안에서 내용이 섞여 말이 더듬어 지는 습관이 있다. 처음 작가와 알아갈 즈음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묵직한 성격으로 기억난다. 분명 조금씩 틀을 깨며, 남들과 대화를 위해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이고, 그런 중에 원치 않는 버릇이 생긴 것으로 추정해 본다. 이런 추정의 이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소통을 위한 위장의 언어들을 걸러내기 위해, 작가 스스로가 무척이나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작업의 주제는 원할한 소통의 바램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대신 먼저 자신을 바라보며, 방식을 관찰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가변적인 정서의 굴레들을 스스로 바라본다. 그런 과정들은 공포로 다가올 정도의 부족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일 테지만, 그것을 풀어내 예술로 표현하는 것이 작가로서, 또한 한 개인으로서의 바램인 것이다. 어쩌면, 공포의 후유증이 작가가 말한 본인의 말더듬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창피해 하지 않는다. ‘더듬’ 은 언어를 뱉기전에 숙고할 이유를 주었고, 숙고의 타이밍은 단어를 고르며 대화의 맥을 짚을 수 있는 여유가 되었다.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 노력하는 자세가 이쁘다.
작가의 아내 역시 오랜 지인이다. 오히려 작가보다 먼저 그녀를 알고 있었기에 둘의 결혼은 소꿉장난 같은 느낌 이였다. 이제 둘은 두 아이의 부모다.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며 현실화 되는 사회는 아주 가깝고 직접적으로 다가오며 지금까지 공들여온 여러 내재화된 각성들을 쓸모없게 만든다. 작가는 그 쓸모없어질 위험에 처한 주제들을 다시 걸러내며, 변화된 환경에 맞는 고립을 선택한다. 사회를 겨낭한 분노를 가감없이 표현해 전시로 이끌어냈었고, 또한 트레이드 마크인 배채기법을 통한 색의 나열들을 과감히 버린다. 관객 또는 친분있는 이웃들이 팬으로서 찾는 외형적 공식을 철저히 외면 한 채, 바뀐 주변 상황에 대한 감내를 통해 더욱 진솔한 탈피를 시도한다. 스스로에게 주는 도전과 실험에 대해 한 치도 두려움이 없는 듯하다.
이번 플레이스막의 'BLIND'전 에서의 작품들은 모두 채도가 없다. 명도 또한 아주 낮은 상태로, 작품을 의도적으로 관찰하지 않을시 내용을 감상할 수 없다. 그의 유도된 감상법은 이전 시리즈의 중심 오브제인 가스마스크라는 장치의 내-외부적 전복이자 화면자체에 씌여진 마스크의 강압적인 통제 마냥, 그림 자체에서의 불편한 감상을 통해 단절된 소통의 답답한 사회를 비춰보려 한다. 전시기간동안 작품을 바라보며, 이토록 허리와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작품 전체를 꼼꼼히 보았던, 아니 볼 수밖에 없었던 전시가 있었을까 싶다.
하용주 작가와 함께 전시를 만들며, ‘참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작가다.’라고 느낀 이 진부하고 보편적인 평가가 전혀 어색하지 않음이 참으로 고맙다. “제가 회화를 계속하는 동기는 즐겁기 때문이에요.” 여전히 복잡한 고민과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관객에게 묻기 위해 평면을 고집하는 작가에게 이 전상서를 드린다.
◼︎ 유디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