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네스의 책 de te fabula narratur_162.2 X 112.1cm, 리넨에 유채, 2016
맥락을 알 수없는 배경 속에 놓인 인물들은 정지된 듯,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하나 이상의 물건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마치 아이템을 가지고 가상의 공간 속에 놓인 게임 속 캐릭터와 흡사하다. 작가는 왜 알 수 없는 공간에 무기로 보이는 물건과 인물을 그려 넣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누구일까?
루크레티아 martyrdom of lucretia_162.2 X 112.1cm, 리넨에 유채, 2016
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ratur
이 라틴어 경구를 발견한 곳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다. 거기에서 본 이것은 이 그림들의 핵심 주제어가 된다. 연대라는 말은 바로 이 말, 즉 ‘이름을 바꾸면 그 이야기는 너에게 꼭 들어맞는다’와 같은 의미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나의 친구들이고 지인이면서 동시에 관람자가 되기도 하고 그들의 친구, 가족이기도 하다.
- 작가 노트 중에서 발췌 -
루크레티아 martyrdom of lucretia_162.2 X 130.3cm, 리넨에 유채, 2016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작가는 주변의 지인들을 섭외하고, 그들의 평범한 매력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생뚱맞게 무기를 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 서있는 것일까?
이번 작품들은 작가의 과거 걸개 그림과 사회 비판 포스터 같은 민중미술적 작품들과 달리 중세 종교화를 차용하였다. 작품의 제목들은 중세 기독교 순교자들의 이름을 따왔고, 작품 속 물건들은 지물이라 하여, 종교화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사물이다. 이는 성인(聖人)의 상징이기도 하다. 성인(聖人)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기 위한 종교화를 오늘날에 차용한 것은 고루한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순교자가 되는 과정을 살펴 봄으로서 이러한 오해를 해결할 수 있을 듯하다.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 martydom of catharina_193.9 X 130.3cm, 리넨에 유채, 2015 ~ 2016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기 전, 그들은 자유로운 개인에 불과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국가와 사회의 지배 이념과 다른 이념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믿음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에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는 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하였고, 그들은 몫이 없는 자로 즉, 제외 대상이 되었다. 이렇듯 국가 폭력과 같은 사건들은 필연적으로 뺄셈을 만들어낸다. 숭고함이 만들어지는 지점은 그 이후이다. 국가의 폭력 속에서도 저항하던 한 개인의 믿음이 훗날의 국가와 사회의 지배 헤게모니가 되었을 때, 그들은 순교자요, 성인(聖人)이요, 믿음의 증거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고, 그들이 이야기는 전설이 된다.
우르술라 martydom of ursula_116.8 X 91cm, 리넨에 유채, 2016
작가는 종교화 속 성인(聖人)을 작금의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으로 대치하여 그림으로서, 자유로운 한 개인을 잠정적 성인(聖人)으로 세탁하였다. 이러한 발상의 배경은 지금의 현실이 아닌 다가올 세상에 대한 희망 혹은 놓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아닐까 짐작하여 본다.
도로테아 martydom og dorothea_130.3 X 130.3cm, 리넨에 유채, 2016
그리고 종교화 속 순교자들의 탄생과 그 과정은 오늘날의 사회면 신문과 뉴스를 통해서도 읽어낼 수 있다. 그렇기에 성인(聖人)은 더 이상 숭배의 대상이 아닌, 그림 속 대상이자 관람자로 오늘날을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작품 속 지물들은 성인(聖人)을 지칭하는 상징이자, 현실 속 인물과 함께 함으로써 발생하는 다의적 해석 속에서 알레고리적인 방식으로 원래의 그 의미가 지워지게 된다. 이로써, 의미가 고정된 숭배의 대상이 아닌 현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vox populi, vox dei_130.3 X 97cm, 캔버스에 유채, 2016
그리고 작품 속 인물들이 서있는 맥락이 제거된 공간은 자유로운 개인이 가진 믿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이자, 그것이 변화되는 현실로서 이중적인 가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런한 가상의 공간은 공교롭게도 작금의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서 현실이며, 우리가 서있는 배경이다. 전시의 서문을 마치면서 작가의 믿음이, 오늘을 살아가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믿음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 구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