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텍스트와 이미지, 드로잉, 회화, 조각, 발견된 오브제 등의 병치를 통하여 관계 맺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해왔다. 텍스트의 변형을 통한 이미지의 형태, 문서나 밀랍을 통한 조각, 그리고 실수를 과장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또한 ‘쓰기’와 ‘읽기’의 과정에서 이중의 시각작용과 심리적인 기제들에 주목하였다. ‘보여줌’과‘노출성’ 그리고 ‘보기’와 ‘관음성’과 같은 대응적으로 상응하는 작용들에 주목하여 투명한 스크린을 공간에 설치하고 사람들 앞에서 ‘행위적 글쓰기’를 통하여 시각화 하였다. 언어의 불확실성과 감각적인 특성에 주목하여 기호화된 의사소통의 수단인 언어와 그 대상인 사물의 관계와 그것을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해 왔다.
이후 이중적 시각의 작용이 인터넷매체 내에서 셀피(selfi: sns상의 개인프로파일, 혹은 올리는 행위)와 같은 재생산된 얼굴의 이미지에서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디지털 이미지를 차용하여 인물회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인터넷상 디지털 인물이미지가 지니는 새로운 미감을 관찰하고 뉴미디어의 효과를 회화라는 보다 전통적인 미디어의 효과로 전치하여 표현하면서 인물회화 작업을 발전시켜 왔다.
얼굴은 말과 더불어 대화의 일부가 되어 감정상태를 전달하기도 하고,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며, 유일하면서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항상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뉴스피드를 통하여 매일 업로드 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유동하는 이미지들을 접하면서 재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져가는 이미지들에 대하여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반면 새로이 생성되어 출현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인상적인 이미지들에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친밀하게 눈 앞에 펼쳐지는 타인의 얼굴들, 그 형상들을 관찰하는 것은 나에게 언제나 새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어느 지점으로 작용한다.
인물의 고유한 형태감을 관찰하고 이로부터 환기되는 이미지에 촉각적 상상을 더하여 회화로 구현한다.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인물의 얼굴에 가까이 들어가서, 그 인물의 배경정보를 제거하고 얼굴의 요소에 집중하여 얼굴과 미묘하나 감각적인 몸의 제스처에 주목하면서도, 대상을 분명하게 재현해 내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직관적인 해석의 방식으로 속도감 있게 드로잉 하듯이 그린다.
이미지를 바라보는 과정, 이를테면 이미지로부터 끊임없이 시각적으로 환기되고 상상하게 되는 것은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리기라는 행위와 회화라는 미디움이 갖는 물리적인 특질들은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인물이나 식물을 모티브로 하여 그리는 과정에서 상상으로 출발하여 그것의 이행과 더불어 출현하는 뜻밖의 현실성으로 화면 위에 구현되는 것들-색감, 형태, 질감, 그리고 손의 흔적-과 같은 요소들을 긴장감 있게 바라본다.
Daily Sensation
I have been working on posing questions about making associations, which has involved juxtaposition of texts, images, drawing, painting, sculpture and discovered objects etc. The work is aimed at revealing the shapes of images through a transformation of texts, sculpture with documents or wax, and the style of writing that exaggerates mistakes. I also focused on the double effects of visual perception and psychological mechanisms in the processes of ‘writing’ and ‘reading’. Focusing on actions of matching correspondence such as ‘revealing’ and ‘exposure’, and ‘seeing’ and ‘voyeurism’, I visualized them by installing transparent screen in space and carrying out ‘performative writing’ in front of viewers. Highlighting the uncertainty and sensitive characteristics of language, I have questioned the relationship between language on one hand, a means of symbolic communication, and objects on the other hand - the described - as well as the issue of interpreting it.
Later, I have taken an interest in the phenomenon of how the effect of double perception is maximally represented in the reproduced images of faces such as selfies on the internet media (here ‘selfies’ include both the personal profile photos on social networks as well as the action of uploading them). Therefore, I have started portrait painting based on digital images. I made observations on the novel aesthetic senses in digital portrait images on the internet and developed the portrait painting works by transposing the effects of the new media into those of painting, a more traditional medium.
I have always been interested in faces because one’s face can become a part of conversation alongside spoken words, conveys emotional states, carries out the function of non-linguistic communication, is unique, and has meanings by itself. Seeing fluid images of numerous people being uploaded every day on the newsfeed, I feel a sense of pity for the images that are quickly consumed and disappear. On the other hand, the striking images of diverse people that are newly produced and introduced never fail to intrigue me. Watching faces of other people that unfold in front of my eyes with intimateness and observing their figures always work as a point where a new expression is made possible.
I observe the unique form in the figure of a face and, by taking the image that it evokes and adding tactile imagination, the result is embodied in painting. I close up on a person’s face, eliminate the background information of that person, and while concentrating on the elements of the face and focusing on the face and the subtle but sensitive gestures of the body, I rapidly paint in a manner more of drawing with immediate, intuitive interpretation rather than clearly representing the object.
The process of viewing an image – for example, being ceaselessly refreshed visually by an image and imagining about it – works as a driving force for me. The activity of drawing, and the physical properties that painting has a medium, are the way of realizing it. In the process of painting with a figure or a plant as a motif, starting with imagination, and what results on the canvas with unexpected reality that emerges in conjunction – colors, shapes, materiality, and manual traces – such elements create tension.
Lim Soonnam
어떤 얼굴 XXXXIV, A Certain Face XXXXIV_린넨에 유화, oil on linen_60.6x60.6cm_2021
어떤 얼굴 XXXXV, A Certain Face XXXXV_린넨에 유화, oil on linen_80.5x60.6cm_2021
소녀, The Girl_ 린넨에 과슈, gouache on linen_53x41cm_2017
열대정원 III, Jardin Exotique III_린넨에 유화, oil on linen_163x145cm_2020
열대정원 I, Jardin Exotique I_ 린넨에 유화, oil on linen_99x99cm_2018
낮잠 자는 아이, The Napping Child_린넨에 유화, oil on canvas_72.7x60.6cm_2017
핏기없는 얼굴과 핏기 도는 얼굴 사이의 시소
I. 얼꼴과 얼굴 너머
임순남의 회화 작업 전반은 ‘얼굴’로 이뤄진다. 이는 너무나 자명한 기술로, 별다른 수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의 그림이 ‘초상화(portrait)’의 전통에 귀속된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21세기의 얼굴’이란 부제가 달린 그의 흥미로운 책(『페이스월드 Faceworld』)에서, 마리옹 질리오(Marion Zilio)는 “세계의 페이스북화”가 갖는 함의를 역추적하면서 “초상이 얼굴로 미끄러”([l]e glissement du portrait au visage)”지고, 그것이 다시 “비-얼굴(non-visage)”로, 즉 “내면성 없는 순수 외면성([p]ure extériorité sans intériorité)”인 “얼굴 없는 얼굴들(visages sans visage)”의 창궐로 이어지는 과정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는 “얼굴은 더이상 영혼의 창이 아니라, 벽보, 슬로건, 명찰, 또는 하나의 ‘배지badge’”가 되었다는 자크 오몽의 진단과 공명하는 것이면서, <어떤 얼굴 A Certain Face> 시리즈로 대표되는 임순남의 얼굴 이미지들 대부분이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일련의 ‘셀피selfie’들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사실과도 연동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예를 들어 2017년 5월부터 인스타그램에 진출해 “셀피를 재발명”했다는 평가를 얻은 신디 셔먼과 같은 이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아니다. 각종 앱을 이용해 자신의 얼굴을 접었다 펼치고 늘였다 줄임으로써, 1970년대 말 『무제영화스틸 Untitled Film Stills』 시리즈로 자신이 열어젖힌 바 있는 ‘익명적인 얼굴(anonymous face)’의 전통을 디지털 플랫폼 속에서 화려하게 연장시킨 셔먼에 비하면, 임순남이 그리는 얼굴들은 지극히 소박하고, 무엇보다 담담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의 작업은 윌렘 드 쿠닝으로 대표되는 추상 표현주의를 경유해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업에서 일종의 정점에 오른 후, 아드리안 게니(Adrian Ghenie)의 ‘파이 연구(Pie Studies)’ 시리즈를 통해 새 피를 수혈한 전후 서구 회화의 ‘얼굴해체(undoing face)’의 계보나, 그 자장과 동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자신들만의 변주를 수행해온 김병관, 서원미, 박경진 등의 국내 작가들 작업과도 포개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임순남의 작업이 점유하는 영토는 어디에 위치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이는 그의 작업들이 보여주는 얼굴들이 일반적으로 ‘사실적’이라 지칭되는 규정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눈썰미가 좋지 않다하더라도 지난 10여년 간 한국의 온라인 매체로부터 유폐된 삶을 살지 않은 이라면, 거기서 안경 쓴 영화배우 하정우나 유아인, 한현민과 조나단, 또는 이어령 선생의 얼굴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물론 그의 작업들이 항상 ‘유명인(celebrity)’들을 다루는 건 아니므로, 그의 작업이 구현해낸 ‘얼굴’들이 모두 ‘사실적’이라는 기술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유명하지 않은, 신디 셔먼의 표현대로 ‘이름 없는’ 이들의 얼굴이 비교적 ‘사실적’이라고 얘기하는데 필요한, 현실 세계의 이미지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방금 ‘현실 세계의 얼굴’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얼굴 이미지’라고 썼는데, 이 둘 사이의 구분 불가능성은 방금 언급한 ‘유명인’들의 얼굴 이미지들 역시, ‘사실주의적’이라고 규정하기엔 애매하다는 사실로 우리를 되돌려보낸다. 이는 그 얼굴들이 인터넷에서 유통되었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들이라는 점뿐 아니라, 그들이 이른바 ‘프로필 사진’이라는 점과도 관련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후자가, 예를 들어 해당 개인의 ‘영혼’을 읽을 수 없기에 ‘진짜 얼굴’이 아니라는 식의 낭만주의적 전제가 아니라, 이 얼굴들 전체를 관류하는 회화적 특징들이다.
II. 핏기 없는 얼굴과 핏기 도는 얼굴 사이
그것은 무엇보다 색채와 관련된다. 그것은 아주 옅은 핑크, 혹은 한때 ‘살색’이라 불렸던 색감을 지칭하는데, 이는 임순남의 작업 전반을 통주저음(basso continuo)처럼 관통하는 로우키(low-key)의 정동(affect)과도 연동된다. 변홍철은 이를 “음악의 단조와도 같은 칼라톤”이라고 기술한 바 있는데,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아주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작업이 예를 들어 ‘슬픔’이나 ‘우울’의 정조를 자아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장조(메이저 키)’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적극적으로 자아내는 ‘마이너 키’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작업을 오랫동안 곱씹은 끝에, 내가 잠정적으로나마 정착한 표현은 ‘핏기 없다’는 것이다. 그의 얼굴들에는 핏기가 없다. 이는 그의 얼굴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이른바 ‘사실적’인 연상, 즉 도상적으로 그의 얼굴 이미지들이 우리가 아는, 아니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익숙한’ 이미지를 환기한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사실적’이라고 단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가늠하게 해준다.
물론 엄격히 말해 ‘핏기가 없다’는 표현 역시 정확한 건 아니다. 그의 얼굴들에 핏기가 ‘없지는 않다.’ 이는 한 편으로, 핏기 없는 옅은 분홍이 그에 못지 않게 옅은 회색조의 색채와 만드는 자장 때문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거의 수묵화에 가까운 흑백만으로 색채가 최소화되었던 몽골인들의 작업 때문이다. 말 그대로 ‘새하얀’ 후자의 얼굴들보다는 생기가 돌지만 여전히 ‘핏기 없는’ 그의 최근 얼굴들은, 따라서 일종의 ‘임계점’을 이룬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이 ‘임계점’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를 ‘웅변’해주는 건 ‘열대 정원 Jardin Exotique’이라 이름 붙여진 그의 정물 연작이다. 정물은 ‘얼굴’이 아니지 않은가?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보나르(Bonnard)와 뷔야르(Vuilllard)에게서 물품, 식탁보 위의 컵, 찻주전자가 어떻게 얼굴화되는가”라고 물었던 들뢰즈와 가따리, 그들 이전에 참치나 가젤, 또는 말과 소와 같은 동물들 또한 얼굴을 갖는다고 적시했던 르루아-구랑을 환기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진정,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이국적exotique’인 건 ‘열대 식물’이 ‘얼굴’을 갖는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핏기없는 열대 식물’이라는 기이한 회화적 구현물 자체일 것이다. 밝은 태양과 무성한 잎으로 대별되는 열대식물에 핏기가 없다니! 하지만 이조차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그것은 이 ‘열대 식물’들이 ‘핏기가 없’는 것인지, 이제서야 ‘핏기가 도’는 것인지를 단정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핏기, 혹은 생명력은 지금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양자택일의 방식으로 답하는 건 어렵다. 임순남의 작업을 관류하는 ‘핏기 없음’은 바로 이러한 구분불가능성의 차원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이를 놓치면 안된다.
이는 동시에 그가 포착한 얼굴들 대부분이 인터넷과 SNS상의 프로필 사진들에 근거한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그것은- 후자를 이른바 현실의 ‘진짜 얼굴’과 비교해 ‘가짜’로 기각하려는 관습적인 방식 때문이 아니라- ‘핏기 없는 현실(속의 이른바 진짜 얼굴)’을 그 어떤 것보다 화사하고 생명력 있는 것으로 활성화시키는 인공적 이미지들 또한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즉 ‘핏기 없는 현실’에 ‘피가 돌게 하는’ 그림은 좋은 게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피가 도는 것인지 빠져나가는 것인지를 명확히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임순남의 그림이 포착한 얼굴들의 본질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구분불가능성, 혹은 규정의 어려움이야말로 SNS를 가득 메우는 얼굴들과 “세계의 페이스북화” 자체의 특성이라는 것이 임순남의 그림이 포착하는 감각의 논리이다.
“반드시 진실이기를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얼굴을 통해 무엇이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크 오몽의 기이한 말은, 정확하게 이런 의미에서 임순남의 작업과 공명한다. 그가 아날로그와 디지털, 회화와 사진, 장조와 단조, 핏기의 임계점 사이에서 절묘하게 붙잡아 되살려낸, 미래를 알 수 없는 SNS 시대의 초상 전통과 함께.
곽영빈_연세대학교 객원교수
Seesawing Between Anemic and Sanguine Faces
I. Beyond the Form of Soul and Face
Lim Soonnam’s paintings are made up of faces. This description is resoundingly self-evident so much so that no further comment seems necessary. And it is virtually indistinguishable from saying that her works belong to the tradition of ‘portrait.’ Is that so, however?
In her intriguing book Faceworld subtitled ‘Face in the 21st century’, Marion Zilio traces the implications of “facebookization of the world” backwards in full measure, while reconstructing the process in which “the portrait slides down to the face,” only to gliding to “non-face,” i.e. “faces without a face” or “pure exteriority without interiority” proliferates. Not only does it resonate with Jacques Aumont’s diagnosis (“Face is no longer the window of the soul but a poster, a slogan, a tag, a badge”), but also it is coextensive with the fact that the majority of face images, as represented by Lim’s <A Certain Face> series, is based on a series of ‘selfies’ circulating online.
And yet, it does not necessarily mean that Lim follows the footsteps of, say, Cindy Sherman whose Instagram works since May 2017 have been praised as “having reinvented selfie.” In contradistinction to Sherman’s new works, which have splendidly renewed her own legacy of ‘anonymous face’ born of the famous <Untitled Film Stills> series since the late 1970s in the digital platform, Lim’s faces are utterly simple- or, more than anything else, rather calm.
At the same time, her works do not overlap with, say, the genealogy of ‘undoing face’ in the postwar Western painting which, after Willem de Kooning’s Abstract Expressionism, culminated in Francis Bacon’s oeuvre before receiving a fresh blood transfusion from Adrian Ghenie’s ‘Pie Studies’ series- nor with the footprints of Korean artists such as Kim Byungwan, Seo Won-Mi, and Park Kyung-Jin whose painting works have performed variations of the former while maintaining dynamic tensions.
Then where does the territory occupied by Lim’s works reside?
If answering this question is not as easy as it seems, it is because the faces her works exhibit appear to conform to the so-called ‘realistic’ codes. Had one lived a relatively normal life vis-à-vis online media in Korea, say, for the past ten years, s/he can readily recognize the faces of the following: popular movie actor Ha Jung-Woo or Yoo Ah-In, Korean-African(-American) model/celebrity Han Hyun-Min and Jonathan, or Lee O-Young, arguably one of the most well-known public intellectuals in Korea to date,
To be sure, it is far from correct to say the faces Lim’s works portray are ‘realistic’ with no exception since not every work of her own addresses ‘celebrities.’ For we are not provided with the images from the real world, the background we need against which we can declare that the faces of these unknown, or- to use Sherman’s expression- ‘anonymous’ people are relatively ‘realistic.’
I just wrote “images from the real world,” not “faces from the real world.” This indistinguishability sends us back to the fact that the above-mentioned celebrities’ face images are no less hard to be designated as ‘realistic.’ On the one hand, it is related to the fact that we are used to these faces as they were circulating online; on the other hand, it has to do with the fact that they are so-called ‘profile photos.’ Crucial here is not so much a Romantic premise that these are not ‘real faces’ of those concerned as the painterly features traversing all of these faces.
II. Between Anemic and Sanguine Faces
Above all, it has to do with a color. Or more precisely, it pinpoints an extremely light pink, or what once (improperly in retrospect) was called a ‘skin color,’ which is coextensive with a low-key affect as a basso continuo running through Lim’s works in its entirety. Commissioner Byun Hong-Cheol once described it as a “color-tone of a minor key in music” and, while I agree with it to a certain extent, this is not a correct description. For Lim’s works do not promote or contribute to a feeling of ‘sadness’ or ‘melancholy.’ Not a ‘major key’ for sure. Still, nor a ‘minor key’ actively squeezing tears either.
As a result of my extended rumination, I’ve landed on an expression, albeit temporary: ‘anemic’ or ‘bloodless.’ Lim’s works are anemic or bloodless. This description is not only getting along with the fact that those face images in Lim’s works are reminiscent of the so-called ‘realistic’ impressions, i.e, that speaking in terms of iconology, they recall images we know or at least images we are familiar with; but also, simultaneously, that this description helps us to guess what makes us hesitate to declare them ‘realistic.’
To be sure, ‘anemic’ or ‘bloodless’ are far from precise expressions. Faces in her works are ‘not without blood.’ They are imprecise not only because the bloodless light pink engenders magnetic field with the help of a no less light gray. At the same time, they are imprecise considering Lim’s works on Mongolians where the use of colors was minimized to the point of becoming a Chinese black and white painting. While taking on more vitality than those ‘pale white’ ones in the latter, ‘anemic’ faces in her more recent paintings can be said to constitute a ‘critical point.’ (We will return to this ‘critical point’ shortly.)
Still, more fundamentally, it is Lim’s series painting, entitled, ‘Jardon Exotique’ which eloquently suggests why they are imprecise. Are ‘nature morte’ faces? Why not? If we recall Deleuze and Guattari who asked “when a utensil becomes a face-landscape from within, or when a cup on a tablecloth or a teapot is facialized, in Bonnard, Vuillard?”, and Leroi-Gourhan who indicated that animals such as tuna, gazelles, horses, and cows also have faces.
What is truly and literally ‘exotic’ is less the fact that ‘tropical flora’ have ‘faces’ than the peculiar painterly embodiment called ‘anemic or bloodless tropical flora’ itself. How strange it is for ‘tropical flora’ to lack vitality or appear anemic! Still, this description is incorrect as it is difficult to maintain whether these ‘tropical flora’ are ‘bloodless’ or blood is returning to them. Is blood or vitality draining or coming back? Answering this question with a strict ‘Yes/No’ manner is virtually impossible. The ‘anemia’ or ‘exsanguinity’ traversing Lim’s oeuvre is operative precisely in this indistinguishability. This point must not be lost.
And it is no less related to the fact that the majority of the faces in Lim’s works are based on online profile photos. It is- less because of the conventional way in which the latter is denounced in favor of the so-called ‘real faces’ in reality but- because artificial images, rendering ‘anemic reality (or the putatively real faces in it)’ vigorous and lively more than anything else, do exist. If so, isn’t a painting that helps ‘anemic reality’ or its blood circulate anew, a good one? To reiterate, however, the essence of the faces Lim’s paintings capture precisely lies in the inability to decide whether blood is about to recirculate or be drained. Or to be more rigorous, that such indistinguishability or difficulty of descernment is the feature of the faces populating the SNS as well as the “facebookization of the world”- this is the logic of sensation Lim’s works capture.
It is precisely in this sense that Jacques Aumont’s peculiar statement (“As long as we do not insist on their truthfulness, we can talk about anything through faces.”) resonates with Lim Soonnam’s oeuvres. That is to say, along with the legacy of portraits she snatched up and revived on the critical point between analogue and digital, painting and photography, major and minor key, anemic and sanguine faces- in its unknown future.
Yung Bin Kwak_Visiting Professor, Yonsei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