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여자_Acrylic on canvas_40.9x53.0cm_2020
기 센 동네_Acrylic on canvas_155x200cm_2022
눈물이 그치지 않아_Acrylic on canvas_112.1x162.2cm_2022
근사한 정직
방정아 그림의 감각은 세 가지 과정을 갖는다. 하나는 작가가 타인으로부터, 사건으로부터, 세계로부터 받는 느낌 안에서 삐져나온 감각이다. 다른 하나는 작가의 느낌이 그림이라는 물질이 될 때, 그 사이에 놓인 시차에 관한 해석으로서의 감각이다. 이렇게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난 뒤, 그렸을 당시 작가와 무척 친밀했던 그림의 감각은 다시 작가와 멀어지기도 하고 또 불특정한 어느 시점을 계기로 가까워지기도 한다. 이처럼 그림을 그린 후 오랜 기간에 걸쳐 다변하는 감각의 전환이 발생한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시점의 느낌에도 결코 거짓은 없다. 느낌은 작가에게 들이닥친 현실이자 사실이며, 방정아는 그 느낌의 진실을 거부하지 않는다. 우스운 느낌, 기묘한 느낌, 어색한 느낌, 옳은 느낌, 슬픈 느낌, 부족한 느낌. 그가 느낌을 선명하게 맞닥뜨릴 때마다 그림의 형식 또한 적극적으로 변모한다. 다만 작가가 언제나 진심으로 수행하는 느낌과의 진검 승부가 그림의 곳곳에 남아 모두 방정아의 그림임을 증명한다.
이러한 맥락으로 ‘현실주의 작가’로서 방정아의 토양은 ‘세계를 겪는 나’에 있는 것 같다. ‘세계를 겪는 나’를 살피는 일은 경험의 양으로 해결되지 않는 예측 불가능성을 끌어안는 일이다. 이때의 예측 불가능함은 비단 닥쳐올 사건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이는 방정아가 그의 그림에서 선을 그려나갈 때와 같은 그리기의 수행에도 연관되며, 작가가 어떤 상황으로부터 갖게 되는 느낌을 스스로 알아채는 과정에도 들어있다. 방정아는 종종 작품에 관해 말할 때 자신의 선택과 거리를 두며 말하는 화법을 취한다. 이를테면 ‘내가 요즘에는 내 그림의 저런 부분을 불편해하지 않더라’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는 작가의 선택이 가지는 직관성을 함의하기도 하며, 그리기와 감각적 인지에 사이에 빈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마찬가지로 느낌을 인지하는 일이 애초에 논리적인 서술을 기대하지 않듯, 방정아의 그림 속 신체 감각 또한 합리적인 비율과는 거리가 멀다. 예컨대 등이 기이할 정도로 길거나, 뒤돌아 선 고개가 비현실적으로 뒤틀려 있기도 한다. 데생에 있어서의 고전적인 균형과 비례는 방정아 그림 전체의 조형성 안에서 해체되며 작가의 고유한 형식으로 수렴한다.
자신의 느낌을 면밀히 감지하고, 기억하고, 소환하는 작가의 그림에는 많은 타인이 등장한다. 하나의 그림 속 여럿의 인물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결코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들의 눈은 저마다 자신의 세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서럽고 불안한 것은 매 한가지인데 정작 말은 꺼내지 못한 채 하릴 없이 시간만 죽인다. 같은 곳에 있지만 마음의 크기나 온도가 다르다. 누군가는 파도가 다가올 때 뛰어들고, 누군가는 멀찍이 서서 관망한다. 이도 저도 아닌 마음으로 파도와 모래사장 어중간한 곳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이도 있다. 사랑 영화를 준비할 때도 각자의 욕망을 한 가지로 에두를 수 없다. 갇힌 여인의 표정은 하나의 의미만 갖지 않는다. 이 모든 오만상의 타인들이 제각기 다른 얼굴로 자신 안으로 침잠할 때, 그들이 도착하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그림을 그리며 가장 먼저 작품의 관객이 되는 작가 자신의 방이며, 그림을 보는 관객 자신의 방이다. 그러니 어쩌면 그림 속 인물들이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이든 불화이든 간에 ‘나’의 자화상들이 눈길을 주는 관계를 만든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그들은 그저 그림의 시간 안에서 자신을 느낀다.
시각예술에서 글은 배격해야 하는 요소로 비평되곤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글이 이미지를 부연하거나 해설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방정아의 그림 속 글은 그림을 설명하지 않는다. 글은 오히려 그림에 아우라를 준다. 때때로 글은 그림보다 더 직관적으로 서술되며, 그림에 추상성을 부여한다. 글은 감상의 시간을 틔워주고, 보는 이를 순식간에 다른 장소로 보내버린다. 그야말로 글은 감상의 공간을 할애해주는 요소로서 방정아의 그림에서 꼭 필요한 곳에만 사용된다. 그 적합성은 신중하게, 면밀히 따지고, 절제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작가의 직관에 기댄다. 요컨대 방정아의 그림 속 글은 그림이다. 글은 대체로 선과 색을 같이한다. 선은 방정아 그림체의 독특한 요소이기도한데, 인물의 형체나 대상이 윤곽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었다기에는 아주 많은 양의 선이 하나의 형상을 구성한다. 여러 겹의 선은 인물의 동세를 직감하게 만들고, 고요하지만 요동치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은유한다. 방정아는 한번 그린 선은 바꾸지 않는다. 선은 다만 증식할 뿐이다. 반면 색은 선과는 상반되는 결정 과정을 갖는다. 방정아는 하나의 면을 칠하는데도 수많은 색을 겹쳐 올리는데, 색의 결정은 작가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계속해서 바뀐다. 작가가 수용한 마음의 변화는 칠하는 색의 변화로 치환되어 밀도를 만든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느낌의 인지와도 직결된다. 자신이 원하는 느낌을 색으로 알아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 느낌의 방향은 작가가 스스로 취하는 이질성에 있다. 이러한 이질성이 겹치면서 다시 방정아의 형식이 된다.
방정아는 어느 시기에 미국을 방문했다가 인디언의 역사를 가까이 접하고 한동안 무척 속상해했다고 한다. 마치 인디언의 피가 흐르기라도 하는 양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는데, 식민주의에 관한 반발심이라던가 차별과 폭력에 관한 저항감처럼 대의적인 이름을 붙일만한 감정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그저 막연하게 너무나 슬펐다고 회고했다. 타인을 깊이 알고자 하면 내가 더 깊어질까? 방정아는 ‘현실주의 작가’라는 의미를 작가 스스로 재구성해나간 것 같다. 처음에는 작가 바깥의 사건과 그 사건의 당사자들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작가 자신을 타인의 여럿 얼굴로 드러냄으로써 현실을 대면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구축한 것 같다. 이는 옳은 그림에 관한 자기검열의 더께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진솔함을 더욱 마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상태가 아닐까. 방정아의 정직함은 관객의 은밀한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작가의 선택을 통해 보는 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욕망과 현실을 은연중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느낀대로만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이 느낀 것이 누군가에게 드러내놓을 만큼 특별하거나 흥미로울지 제 자신은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게다가 느낀대로 솔직하게 말했는데 그 자체로 근사하기란 또 얼마나 드문 일인가? 그런데 방정아의 그림은 그렇다.
박수지 (독립 큐레이터)
손 끝에서 자라는 별_conte on daimaru_116.8×80.3_2022
마음의 잠_conte on daimaru_53.0×45.5_2022
그것을 동그라미라고 부를까_conte on daimaru_80.3×116.8_2022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기계적인 기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통과하는 생각과 감정들이 기록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라봄, 머무름, 되뇌임 속에서 내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남겨진 것들이 나의 손으로, 손가락 끝에 쥐어진 콘테를 통해서 하얀 캔버스 위로 새겨진다. 선을 하나씩 그어 나갈 때마다 그것들은 구체적 모양새를 갖추고 그리고 힘을 갖게 된다.
그림 속에는 진실, 용기, 절망 온갖 종류의 감정들과 나의 눈으로 저장된 이미지들이 담겨있다. 내 개인적인 감정과 경험들이 마냥 즐겁고, 달콤하고, 아름답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나의 내면은 그렇게 달콤하고 향기로움으로 가득한 감정들이 흐르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내 그림 속에서는 사라지지 않는 순수함(어린아이의 순수함과는 다른)과 작은 불씨에도 타오르는 건강한 열정을 담고 있다. 물론 모든 그림 속에서 항상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항상 발견되는 것은 스스로에게 꾸준히 요구하는 끈기와 긴 노동이다.
아침이 되면 반복적인 일상이 시작된다. 그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도 불현듯 불안감이 찾아 올 때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엔 그 불안감의 물살 속에서 허우적거렸고,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땐 시간을 두고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제는 그 불안감이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새로운 자극을 주면서 공간을 좁혀간다. 수학 문제를 풀거나, 과학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 그런 자극의 한 종류이다. 어쩌면 내 생애 풀리지 않을 빅뱅 이후의 생명 탄생에 대한 비밀을 생각하거나, 지구의 오랜 시간과 우주의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삶에 대한 경건한 자세로 마치 수행자(콘테 선을 수없 이 긋다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와 같은 마음을 갖기도 하고, 늦은 저녁 산책을 하다가 검푸른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무한히 넓은 우주와 그 속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고요한 시간을 소중하게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내 개인적인 순간들(외부의 자극이든, 내부의 자극이든)을 의식화하여 그 순간들을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이미지로 전달하는게 가능할까? 모두가 다른 시간대와 경험들을 가지고 있지만, 정의 내리기 쉽지 않은 보편적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무언가로 이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잘 그리고 싶다’ ‘내 그림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감정을 어루만져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당연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모든 것이 너무나 부족하지만, 다행히도 여전히 그림을 그리면서 몰입할 수 있고, 캔버스 속에서 내가 만들어가는 세계가 만들어 지는 것이 즐겁다. 나의 개인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는 긴 호흡이 필요하다. 긴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열정을 소모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 시간과 열정을 만족할 정도로 소모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르겠다. 속도가 더디더라도, 천천히 단단한 체력과 건강한 열정으로 나를 통과해 가는 것들을 그려 나가는 긴 호흡을 이어가고 싶다.
성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