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툼 DATA TOMB
아주 어릴 적부터 줄곧 그림을 그려온 한 여자가 콜로라도의 한 스튜디오에 있다. 그라비어인쇄기를 다루는 모습이 이제 제법 능숙해 보인다. 스튜디오에 오기 전 그녀는 보스턴 외곽지역에 위치한 아트스쿨에서 판화를 배웠다. 인쇄물을 옮기던 그녀는 작은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에 시선을 빼앗겼다. 하얗고 푸른 빙하가 검푸른 바닷물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아, 겨울이 되었구나. 작년에 봤던 그 빙하 영상이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쯤 그녀의 눈에 뉴스 속보가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넋 놓고 TV를 보는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길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종잇조각처럼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해야 할 일을 마저 하긴 했지만 그녀의 신경은 온통 TV 쪽으로 쏠려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TV 속 장면은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해외에 체류하면서 피부로 느꼈던 자연재해, 매체를 통해서 본 대규모 참사, 가까이에서 겪어 온 죽음 등. 그녀의 감각은 어느새 무감각해져 버렸다.
#pleasure#마티스_프린트 드로잉_140x80cm_2022
#pleasure#마티스#joyoflife_프린트 드로잉_140x80cm_2022
10초 단위로 넘기면서 보다 보니, 2시간짜리 영화는 15분 만에 끝이나 버렸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키워드를 검색 창에 입력했다. ‘예쁜 걸 보고 싶어.’ ‘macaron?’, ‘flamenco?’, 반복해서 검색을 했고 출력된 데이터 중 인상적인 이미지를 저장했다. 이전에 그녀는 가족이 등장하는 거실의 풍경을 찍었다. 그녀는 찍은 사진을 투명하게 만들고 자르면서 겹쳤다. 손이 가는 대로. 그렇게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사진 200여 장이 겹쳐져 있었다. 회화를 떠나 판화든, 사진이든 그녀는 한 번도 그리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미디어에서 수집한 이미지의 집적이 회화처럼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일까. 최혜민은 디지털 이미지를 자신의 순간적 영감에 따라서 편집한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을 쓰지 않게 되었다. 결과를 의식하면 모니터를 보고, 마우스를 클릭하는 순간에만 작동하는 자유로운 연상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더 감각적으로, 어긋나도 괜찮아.’ 작가는 직관의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이런 과정을 ‘한 번에 다 토해내는 심정’이라 했 다. 그렇게 쏟아낸 느슨한 연상은 흔적만 남았고 생성한 레이어 더미는 질감을 얻었다. 프레임 안에 갇혀 버린 수많은 레이어는 그녀를 대신해 뇌까린다.
#pleasure#소주#햄버거_프린트 드로잉_140x80cm_2022
최혜민은 대학에서 회화와 판화를, 미국 아트스쿨과 스튜디오에서는 감광매체와 디지털 이미지를 배웠다. 그녀의 오래된 미술 이력은 강력한 프로세스 수행에 차질 없을 만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가 제아무리 복잡하고 지난하다 해도 그녀에게는 부담되지 않는다. ‘힘든 작업은 싫다.’고 말하는 작가는 작업과정의 즐거움에 도취되어 자신이 얼마만큼 의자에 앉아있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쾌락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즐거움을 한껏 즐기며 만들어낸 이미지는 진지하거나, 심오하거나, 원대하기를 거부한다. 최혜민은 자신이 작업과정에서 느낀 즐거움과 결과물의 다른 측면을 누군가가 찾아주기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아카데믹한 프로세스의 철창에서도 태연하게 탈출했다. 가끔은 천연덕스러운 그녀의 작업 방식에 실소 짓게 되는데, 그녀는 이미지를 감광한 실크 위에 흑연 가루를 쏟고 걸레로 문질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종이 위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걸레로 더럽히며 콜라주 하는 방식이다. 쉬고 싶어서 야자수 나무 이미지를 떠올리고, 짝 소주 이미지 사이에 14만 원짜리 햄버거를 배치하고, 하늘 높이 솟은 기업의 건축물을 여기저기 조합하며 그녀는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아니, 왜 여기에 짝 소주 사진을 넣은 거예요?”
“씁쓸하잖아요.”
두루마리휴지_데이터 콜라주, 디지털 드로잉_112x70cm_2022
두루마리휴지_부분_데이터 콜라주, 디지털 드로잉_2022
최혜민의 작품은 이미지의 무덤인지도 모르겠다. 분절되어 있지만 느슨하게 연결된 이미지를 ⎯구색 맞추기 위해 다시 찾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현실을 망각한 자신에 대한 순종적 태도로 ⎯그림을 그리듯 자르고 붙인다는 지점에서⎯ 한곳에 묻어버린 무덤 말이다. 끝을 알 수 없는 데이터의 우주에서 그녀의 순간이 건저올린 이미지는 생기가 있거나 생기가 없기 때문에 더 그렇게 여겨지는지 모른다. 언제 찍었는지 알 수 없는 빙하 영상이 그러하듯 이미지는 살아있지만 그 실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망각을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쾌감은 우리를 무감하게 만든다. 기념일이 되어도 작은 감흥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을 놓쳐버린 데이터의 무덤은 역설적이게도 살아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누군가의 죽음 옆에서 애도할 때 애도하는 생명이 증명되듯이. 연상하는 대로, 아주 가벼운 사유로부터 얻어낸, 밀도 있는 이미지는 그것을 처음 만나게 했던 키워드를 무색하게 하는 아리송한 정물 사진으로 남았다. 중앙을 차지하지만 바짝 말라버린 엉겅퀴와 작품 한구석에 자리한 올챙이 이슬에서 눈치챌 수 있는 최혜민의 직관적 연상은 작품 여기저기에 사유의 웅덩이를 파 두었다. 범람하는 데이터의 시대에 흩어지고 몰리면서, 공개되거나 가려지는, 거룩하거나 하찮게 회자되는 모두의 죽음과 삶을 비유할 수 있도록.
조각상_데이터 콜라주, 디지털 드로잉_112x70cm_2022
해시태그를 달 듯이 집적한 최혜민의 작품은 자유로운 상상을 허용함으로써 지각의 결정적 순간을 만나게 한다. 시각적 만족을 향한 작가의 황당무계한 콜라주는 작가의 절단되고 뜬금없는 사유의 시간을 고백한다. 노예적 관람 태도에 호도된 동시대 관객은 ‘이 작품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물어올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최혜민의 작품 앞에서는 작가 조차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이유를 추적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다. 그녀의 작품이 가지는 근원은 작품 안에서 찾을 수 없다. 아니 몰라도 괜찮다. 레이어 사이에 끼여 들어간 혹은 잘린 이미지 사이로 흐르는 본인의 감정에 기대어 서있자. 그러면 찬찬히 떠오를 것이다. 당신을 응원하는 이미지들의 낯선 구성이.
“삶이 지겹지 않나요?”
“이미 죽어있는걸요.”
“그래요, 죽음은 여기 있어요.”
“...”
“살아있기 때문에.”
이지혜_전시기획자
올챙이_데이터 콜라주, 디지털 드로잉_146.5x70cm_2021-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