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_상스러운
‘일-상스러운’ 전에서 소개되는 손미정의 작품 21점은 작가가 최근에 그린 것들이다.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라치면 한결같이 ‘자신에 대해 잘 모르겠고, 일상을 그리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작가에게서 왜 이런 그림이 나오는지 알 길은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다. ‘그림을 그리니까 그나마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런 그림들을 그릴까?’ 아니, 다르게 물어보자. ‘그녀가 그리는 그림은 왜 이럴까?’
그녀는 한동안 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어린 시절 안 본 만화가 없을 정도로 만화책에 파묻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지만 어른이 된 그녀는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상상과 자유로움 보다는 사회적으로 적합한 인물이 되기 위해 외부의 것에 맞추어 살았다. 오랫동안 모태신앙이었다는 그녀는 짧게 친 머리에 큰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천장에서 뭐가 기어 나온다거나 예쁜 거를 상상했던 아이의 모습은 여러 가지 정체성이 복잡하게 얽힌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 어린 시절도 남동생을 지나치게 아끼는 엄마의 영향으로 걸 크러쉬 하거나 남성적인 표현을 많이 하며 자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인정욕구 때문인데 여성성을 가지고는 인정받을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었던 것 같다. 반대되는 성향에도 손미정과 내가 비슷한 취향과 심미안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너무 많은 이유이기도 할 테다. 미묘하게 자신의 성에 대해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적 젠더의 역할과는 상관없이 누구의 몸 안에나 자리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조차도 사회적인 숙지나 관성에 의한 것이겠지만 내가 지금 손미정을 두고 생각하는 것은 한 인간이 자리 잡아가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이는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에 있다고 생각해 보게 된다는 것이다.
spring 1 (분홍 비)_oil on canvas_163x133cm_2022
spring 2 (5월)_oil on canvas_146x135cm_2022
그녀가 자기 내면의 성적 반응에 상대적으로 무감각한 것은 사회적으로 명확한 여성성을 찾고자 한 욕구의 반사적 발현이었을 거라 감히 예측한다. 전시 제목을 ‘상스러운’으로 했으면 한 것도 항상 그녀가 그녀 스스로를 사회적 여성성을 쫓으며 살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족, 그리고 사랑을 향한 그녀 내부의 충족 요건의 불충분한 상황은 사랑의 대상이 누구이건 언제나 그녀 자신의 사회적 충분 요건을 채우는 곳으로 향했다. 불만족 하면 할수록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족쇄는 더 단단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신과 사회적으로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된 데에 대한 큰 불만으로 ‘잘못된’ 복장을 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분명히 그녀는 그녀 안에 존재하는 욕구가 죽었다고 여겼다. 내성적이고 조신한 옷을 입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러한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이다. 나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있잖아. 네 안에 있잖아. 가지고 있잖아.’ 하지만 그녀는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명확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채근의 방법이, 태도가 틀려도 상관없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나만이 느낀 거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녀가 그리는 그림은 왜 이럴까?’라는 질문 옆에 서보자. 유기태 디렉터와 손미정은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은 명확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뒤늦게 작업을 시작한 그녀를 위해서 그녀의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손미정의 작업이 무엇인지 더 잘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녀의 미지를 조금이나마 해소해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마지막에 선정된 작품 21점은 3가지 정도의 큰 틀로 나뉘었다. 내가 나눈 분류와 작가와 나눈 대화는 미세하게 짝을 이루며 그녀가 모른다고 표현하는 작업의 몇 가지 이유를 유추하게 했다.
자화상 (답이 없는 날)_oil on canvas_72x83cm_2022
첫 번째 분류는 화산이다. 언젠가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빅아일랜드를 여행했다. 땅속으로 마그마가 천천히 흐르는데 그 위를 밟았을 때의 느낌이 묘했다 했다. 거대한 에너지의 미세한 움직임과 열기, 그 에너지를 뒤덮은 땅의 강함, 자연이 지닌 파괴와 생성의 생명력이 고스란히 그녀의 발바닥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녀는 ‘분명 마그마가 움직이는데 그 에너지는 보이지 않더라.’며 분출해야만 보이는 에너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여기면서 살아온 그녀가 자신을 찾으려고 세계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수확이 있다면 그것은 그림일 테다. 그녀를 얽매던 모든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차원에서 하나의 생명으로서만 존재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녀의 작업 그 자체다. 그래서 그녀가 더 거칠게, 더 단계 없이 그리는 데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모른다. ‘휴식’과 ‘자화상’은 작업실에서도 전시된 것처럼 아래위로 걸려 있었다. 분출을 위한 손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전하는 두 작품은 그녀가 가장 편하게 그린 그림이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 몇 번이나 반사되어 들어온 희미한 빛 속에서 안료를 손에 묻혀 치덕치덕 그렸을 것만 같은 그림을 누군가가 우연히 발견하고 플래시를 터트려 찍은 듯하다. 그리는 동안에 작가 스스로 너무 편했다는 이 작업들은 그녀의 존재가 나에게건 남에게건, 상스럽던, 그렇지 않던 아무 상관이 없어서 그녀를 더 잘 담아내는 것 같다.
다시 태어남_oil on canvas_104x103cm_2022
새의 대화_oil on canvas_120x100cm_2022
두 번째 분류는 풍경이다. 손미정의 풍경은 모두 상상 속 풍경이다. 그냥 손이 가는 대로 그리고 물감들 사이에서 눈에 읽히는 이미지가 나타나면 원래 의도와 다르더라도 형태로 내어준다. 천을 벽에 걸어두고 밤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일기처럼 그리면서 겹겹이 쌓는 방식 ‘초여름 밤’이 있고, 한동안 상상에 빠져 덜컥 그려내는 방식 ‘분홍 비’와 ‘5월’이 있고, 이번 전시에서는 빠졌지만 신나게 그리다가 오랫동안 묶여두고 오랜만에 꺼내 에둘러서 끝내는 방식도 있다. 손미정의 그림에서 뒤섞인 하늘과 산과 물은 강력한 땅의 기운을 전한다.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거대한 땅, 생명의 진동에 의해 통증을 감수하는 땅, 몸을 박차고 나온 생명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땅, 죽은 생명을 분해하는 땅 말이다. ‘다시 태어남’으로부터 ‘유영’까지를 연결해보니, 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두고 본인의 정신적 결벽이 심해서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했던 것에 대해 스스로 용서의 시간을 갖는 것이라 했다. 그녀는 상스럽지 않지만 상스러운 것들을 생성하고, 작업으로써 자신을 복권하는, ‘살기 위한 방법’으로써 작업을 대하고 있다. ‘새의 대화’는 거대한 압력으로 틈을 내고 뿜어져 나오는 가스가 새가 되었다. 순전히 무너진 자신을 다시 세우는 재미를 찾으면서.
유영 1_oil and pigment on canvas_120x100cm_2022
세 번째 분류는 꽃이다. 꽃을 그리는 일은 그녀에게 특별하다. 상상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보고 그리는 까닭이다. 기분에 따라 꽃을 고르고 마음에 드는 화병에 꽂아 만족하며 꽃의 어떤 순간을 빠르게 그린다. 꽃 그림보다 그녀의 순간적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는 작업은 없다. 그래서 그녀의 꽃은 다 다르다. 나는 계속 변하는 현실 속 그녀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 보다 파괴적이고도 생명력 넘치는 세상에 머물고 싶은 듯하다. 나에게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걸까. 나의 취향과 달리 그녀의 꽃 그림은 현실의 그녀를 위로하고, 그녀의 그리기 방법을 강화한다.
분화하지 못하고 거대한 압력의 가스만 분출하던 그녀는 이제 슬슬 모락모락 불을 지피고 하늘로 오르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에게 내재한 모습은 억누른 채 강제적 여성성을 바라고, 원하고, 취하고자 하면서 그녀는 자기 것을 잃어왔던 모양새지만, 이제 억눌린 채 상승하는 압력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옥죄던 상스러운 것들을 태워내고 있다. 여성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작업, 그녀가 원하던 것을 새로운 땅에서 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작업들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을 억누르는 것들에게서 도망칠 준비를 마쳤다. 지긋지긋한 시간 속 수치심과 열등감을 감당하며 그녀는 자신의 몸과 정신을 지불했고, 이제는 명예를 되찾을 땅을 찾아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가 남의 눈치를 보며 입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마귀를 쫓는 몸짓으로의 노출(C. Bonner, 1920)”로 향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으니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끝끝내 승리하기를 빈다.
이지혜
휴식_oil on canvas_79x83cm_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