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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갗 없는 몸짓. 김두진의 <Life> 

 

 

근래 김두진 작가의 작업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수렴된다. 하나는 <<대지 시리즈>>, 다른 하나는 <<해골 시리즈>>다. 이 시리즈가 출발하게 된 계기는 비교적 명확하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작가가 서양 고전주의 미술작품이 묘사하는 인간 신체 이미지들을 전복하려는 시도에서 이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작가는 19세기 프랑스 아카데미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 William-Adolphe Bouguereau의 작품을 주로 그 대상으로 삼았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자답게 부그로는 성서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화 등을 테마로 820점이 넘는 작품들을 남겼는데, 특히 이상화된 여성의 신체를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김두진 작가는 부그로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구도는 그대로 유지한 채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이나 화관, 머리 두건 등은 물론, 인물들의 신체를 매력적이게 보이게 하는데 기여하던 긴 머리결, 급기야는 이들의 부드럽고 하얀 살까지도 모두 제거한다. 그 결과 성모는 하늘과 동정을 상징하던 푸른 망토와 흰 두건을, 천사들은 아름다운 날개의 깃털과 흰 드레스를, 사랑의 신 큐피드는 특유의 곱슬머리를, 사냥의 여신 디아나는 질끈 묶은 검은 머리카락을, 프시케는 치렁치렁한 머리결과 대리석처럼 흰 피부를 잃어버린다. 그 결과 이들은 모두, 두개골을 지탱하는 척추와 그를 에워싼 원통형 갈비뼈, 척주 끝에 붙은 골반과 그 양쪽에 접합된 다리뼈들로 이루어진 해골이 된다. 뼈대를 덮고 있던 살갗, 머리카락, 옷과 장신구들을 제거하고 나니 인물들의 신화적, 종교적, 사회적 위계는 물론, 인종과 성별은 아예 구별불가능해진다. 그림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인물들 사이의 공간적 관계와 이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와 포즈 뿐으로, 그로부터 우리는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을 유추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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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의 전복적 성격은 작가가 해골에 남은 생물학적 성별의 차이, 남성과 여성 골반조차 교묘히 뒤바꿈으로써 더 강화된다. 이는 천사의 날개에도 적용된다. 부그로의 <Song of the Angels>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잠들어 있는 성모 곁에서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세 명의 천사를 그린 그림이다. 같은 제목을 한 김두진의 작품에서 천사들의 날개는 모든 깃털이 제거되고 그 뼈대만으로 묘사된다. 흥미롭게도 그 뼈대는 긴 뼈 아래 깃털이 달린 새의 날개가 아니라, 통상 천사보다는 악마를 형상화할 때 더 자주 등장하는, 펼쳐진 관절들 사이 피부가 깃털을 대신하는 박쥐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김두진 작가의 작업에는 성모도, 천사 (또는 악마)도, 큐피드와 프시케도, 그 외 다른 인간들도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런 존재론적 평평함 Flatness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이 천사가 죽은 인간의 시신 위에 흰 모포를 덮어주는 장면을 묘사한 <Equality before Death>와 천사 두 명이 죽은 인간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Soul Brought to Heaven>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천사와 인간은 가느다란 날개 뼈대가 달려있다는 사실 말고는 서로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김두진 작가의 성소수자적 정체성과 관련해 이를 급진적 평등주의의 제스쳐로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로버트 메이플소로의 사진 <Ken Moody and Robert Scherman>을 해골화시킨 같은 제목의 작품(2012)이나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해골화한 동명의 작품(2012)도 이런 독해 가능성을 지지한다. 그런데 김두진의 작업을 이런 방향으로 이해하려면 던져보아야 할 질문이 있다. 그건 이 작가 작업에 등장하는 해골과 관련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해골은 죽음의 상징으로 이해되어왔고, 이는 김두진 작가 작업에 대한 비평 글에서도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관점을 고수하는 한 우리는 김두진의 작업과 관련해 빠져나오기 힘든 딜레마와 맞닥뜨린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천사, 일반인과 종교적 성인이라는 모든 구별의 논리들이 전복되는 곳이 죽음이어야한다면, 이런 근본적 니힐리즘은 결국 모든 평등주의적 실천을 거세시켜버리는 것은 아닐까? 죽음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무력한 자기 위로가 평등하지 않기에 생겨나는 삶의 고통을 대속할 수 있을까?

 

나는 김두진 작업에 등장하는 해골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는 젊음도, 부도, 아름다움과 명성도 다 부질없다는 바니타스적 표상은, 엄밀히 말해 해골이 아니라 주름지고 썩고, 부패해가는 신체와 결부되어 있었다. 17세기 바니타스 정물에 자주 등장한 두개골은 그 곁에 놓인 촛불, 시들어가는 꽃, 썩어가는 과일과 고기와의 관계 속에서만 죽음을 의미했다. 죽음이란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썩고 부패하는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한스 발둥그린의 <세 가지 삶의 단계와 죽음 Die drei Lebensalter und der Tod>(1510)에서 죽음은 살이 없는 해골이 아니라 해골화되어가는 부패 중인 몸으로 묘사되었다. 해골은 이 부패의 과정을 치른 후에 출현하는, 더 이상 부패하지 않는 존재다. 그 점에서 해골은 나의 죽음 이후 나의 존재를 증거하는 내 신체의 일부다. 살아있는 동안 내 신체 안에 있으면서 죽음 이후에도 내 신체를 증거하는, 죽음을 넘어서는 신체적인 것. 그것이 해골이다. 김두진 작업에 등장하는 매끄러운 금속질의 해골은 뭉그러지고 썩는 살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다시는 부패의 과정을 겪지 않는다. 잘리고, 뭉개지고, 부패하는 신체로 죽음을 시각화하는 조엘 피터 아트킨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김두진의 해골은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그토록 갈구하던, 영원을 사는 기계 몸처럼 강고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김두진의 해골은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삶을 환기시킨다. 이번 전시 <<Life>>와 여기 출품된 작품들에도 파괴나 죽음을 향한 충동은커녕, 삶을 향하는 에로스적 에너지가 넘쳐난다.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 (<Song of the Angels>, <The Charity>, <Cain and Adell>), 제어해야 할 만큼 넘쳐나는 아이의 에너지 (<Love Disarmed>, <Cupid Disarmed>, <Defending Oneself againt Love>), 놀랍도록 빨리 성장하는 아이 (<Cupid>, <Adult Cupid>), 사랑하는 이를 향해 분출되는 열정(<A Dream of Spring>, <Spring Time>, <Invasion>), 하늘로 날아오를 만큼 강한 사랑의 기쁨(<Psyche and Cupid>1,2,3)이, 일하고 (<Going ti the Spring>), 휴식을 취하고 (<Thirst>),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원하고 (<The Prayer>), 때로는 실수와 죄를 짓는(<Guilty>) 지상에서의 삶의 과정이 함께 펼쳐져 있고, 이는 생의 끝을 맞이하는 평화로움 (<Eqauality before Death>, <Soul brought to Heaven>)으로 귀결된다.

 

시들고, 주름지고, 부패하는 살로부터 해방된 해골들의 삶의 여정을 감상하는 건, 감각적인 것에 기반한 미적 향유와는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통상 미술에서 에로스적 에너지는 풍만하고 풍성한 살갗과 피부를 통해 표현되어왔다. 하얗고 아름다운 보티첼리의 비너스나 풍만하게 넘실거리는 루벤스의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신화의 인물을 빌미로 여성의 나체를 그려온 서양 회화의 역사는 신체의 살갗과 피부, 치렁거리는 머리카락, 바람에 나부끼는 치마 등을 통해 살아있음의 기쁨과 열정, 생에의 약동을 표현해왔다. 그런데 그 모든 ‘살(肉)적인 것’을 제거해버린 김두진 작가의 작품에서 삶을 향한 에너지는 그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다른 방법으로 드러난다. 그건 해골들의 몸짓이다. <Prayer>에 등장하는 두 인물, 성별도, 나이도, 인종도 알 수 없는 두 인물은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한 인물은 앞으로 두 손을 모아 초를 붙잡고 있고 다른 인물은 그 상대를 향해 살짝 머리를 숙이고 있다. 이들이 무언가를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들의 복장이나 표정 같은 어떤 ‘살적인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두 해골의 몸짓으로만 알 수 있다. <Defending oneself against Love>에서 자신을 향하는 화살을 피하려는 인물의 심정 역시 우리는 상체를 뒤로 물리고 길게 앞으로 뻗은 두 팔의 자세로부터만 알 수 있다. 인물이 입은 옷이 없이도, 그의 성별, 나이 등을 드러내는 살이 없이도 우리는 <The Charity>의 인물이 가슴에 안긴 두 아이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를 안다. 이들은 성별이나 나이, 입은 옷이나 표정 같은 살갗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몸짓으로 말한다. <<해골시리즈>>를 제작할 때 작가가 해골들의 섬세한 몸짓을 구현하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살갗이 아니라 벌거벗은 몸짓만으로 표현되는 삶의 국면들을 감상하는 건 무성영화를 보는 것과도 유사하다. 우리는 대사 없는 영상 속 배우들의 몸짓을 보면서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또 어떤 말들이 교환되고 있는지 유추한다. 이를 통해 무성영화는 이후 등장한 유성영화보다 인간의 보편적 몸짓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높인다. 김두진 작가의 작품을 볼 때도 이런 시선이 요구된다. 모든 살갗적인 것들이 탈각되고 오로지 골격만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이 이미지들에서 우리는, 지금이 어느 시대 혹은 어느 계절인지, 사랑을 구하거나 거부하는 쪽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물병 속 물을 마시며 갈증을 식히는 이가 노인인지 젊은이인지 알 수 없다. 이런 정보들은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남자건 여자건, 어느 시대, 어느 대륙에서, 어떤 인종으로 태어났건 우리 모두는 그저, 누군가를 사랑하고, 목마름을 느끼고, 일하고 휴식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같은 몸짓을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살갗적인 것이 제거된 김두진의 작품을 바라보다 그 모델이 된 부그로의 원본 회화를 보면, 부그로가 이상화시킨 인물의 옷과 피부, 표정과 살갗들은 지나친 화장처럼 과잉되게 느껴질 것이다.

 

김남시_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김두진작가 인스타 계정 @kimdujin_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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