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회화 작업은 현실이라는 오픈 월드형 게임의 모험을 이어 나가는 과정이 남긴 궤적임과 동시에, 모험을 통해 수집한 다양한 풍경과 장소를 평면이라는 조건 안에서 재구현하는 행위이다. 데이터로서의 풍경과 일상적 드로잉에 기반한 회화적 상상은 작업 안에서 융화돼 특정한 ‘기능적 장소(the functional site)1로서 구현된다. 구현된 시공은 비선형적인 가상의 서사를 지닌, 실재계와 호환되는 한 편의 영화 또는 하나의 게임처럼 나의 삶에서 작동한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유 속에서 얻은 풍경 조각들을 평면에 구상된 여러 대상에 덧입히며 새로운 시공을 만들고 작업 안에서 모험을 이어가며, 완성되는 작품을 통해 여정의 의미를 정리한다. 나에게 회화는 현실에 매개된 일종의 ‘다른 세계’를 향한 통로 역할을 한다.
여러 실재와 가상의 공간을 탐험하는 것은 작업의 주요한 원동력이 된다. 그 장소가 무의식으로서의 꿈의 세계든 오픈 월드형 디지털 게임의 세계든 상관없이, 신체가 움직인다고 인지될 수 있는 조건에서 마주하게 된 특정한 감각들은 회화 작업의 소재가 된다. 언제든 평면 작업을 위한 새로운 경험들이 쌓이며 축적되고, 화가로서의 감각은 현실이라는 경계 없는 오픈 월드가 구체적인 실체를 갖게 해준다.
회화의 풍경 안에서 나는 가상과 실재 각각의 세계에서의 불감증이 보완됨을 느낀다. 회화라는 중간자, 물질로서의 매질은 나를 회화 속 오픈 월드로 이끄는 포털이 된다. 매체와의 상호작용은 내가 만들어가는 오픈 월드와 살이 닿는 과정이다. 모험의 끝에 나타나 완성될 풍경을 상상하며 그곳을 구축하고 소요한다. 단단한 회화의 지지체, 물감 등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유영하는 작업 과정 안에서 한 점의 쿼크 단위로, 아니면 하나의 픽셀 단위로 양자화되는 것 같다. 캔버스를 비롯한 그 위의 질료적 층위들이 가상이자 실재인 다중적인 존재로 변신한다.
지지체로써의 캔버스는 내가 인지하는 오픈 월드를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디바이스인 것 같다. 여러 색상의 물감은 나라는 프리즘을 통해 입자와 파동으로 재맥락화되어 가상의 평면 장 안에서 진동한다. 그림에서 물질과 환영, 가상과 실재에 대한 이분법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평면이라는 환영적인 규격 안에서 나만의 오픈 월드가 펼쳐진다.
회화는 마치 유년 시절에 접한 게임기처럼 마법과도 같은 신비한 현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듯하다. 회화 속 오픈 월드가 어떠한 환희감을 자아낼 수 있을지, 어떻게 나의 현재를 설명할 수 있을지, 그리고 현실을 어떻게 만들어가게 될지 고민하며 작업을 이어간다.
1. 제임스 마이어(James Meyer. 1962 -)가 미니멀리즘의 '즉자적 장소성'에 이어 고안한 개념으로서, 미술의 영역에서 장소가갖는 의미를 유물론적 범위에 국한하지 않고 사이버 스페이스적 성격을 지닌 장소성으로 확장한다.
마지막 겨울_캔버스에 유채_69 x 140cm_2024
연주암 상공_캔버스에 유채_112 x 162cm_2023-24
동굴에서_캔버스에 유채_162x130cm_2023
수유시장_캔버스에 유채_117x91cm_2023
뉴 호라이즌_나무 패널에 유채_미러보드_22 x 27cm_2024
땡땡거리_캔버스에 유채_140x97cm_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