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진공 이재헌
- 꽃밭 속의 형상 figure in the garden_캔버스에 유채_190×150cm_2015
연희동 플레이스막은 4월 7일(토)부터 4월 28일(토)까지 이재헌 작가의 미발표작과 신작을 포함한 15여점의 회화로 구성된 밤의 진공 展을 연다.
미술의 다양한 매체들 중에 회화는 아마도 인간의 내면이 가장 잘 표현되는 매체일 것이다. 그 작품이 구상이든, 추상이든 또는 모노크롬이든 캔버스안에서 만들어진 선과 면, 그리고 오묘한 색감은 보는 이의 시선을 한순간에 사로잡기도 하고 내면 깊숙한 곳에 알 수 없는 동요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재헌 작가는 회화를 통해 동시대 우리가 가진 고민과 여러 감정들을 내밀하게 표현하고, 더 나아가 인간 실존에 대한 탐구를 꾸준하게 그리고 진지한 태도로 수행해 왔다.
'그리고, 지우는' 반복적인 붓질은 그의 독특한 표현기법이다. 작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의 특정 형상을 붓으로 지우는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지워진 형상을 만들어낸다. 지우는 행위를 통해 최초의 형태는 서서히 사라지지만 종국엔 역설적으로 강한 존재감으로 환원된다. 그의 반복적 붓질은 지워가며(부정) 동시에 채워가는 지양(aufheben)의 과정이다. 작가는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지워진 형태에 속성을 부여하려 한다. 그는 '붓질은 확신이고 지우는 것은 의심'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그리는 행위는 오감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지우는 행위는 인식된 세계에 대한 의심이다. 작가는 인식된 세계를 의심하는 것으로부터 실존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시각에 의존한 인간의 신체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지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밤' 그리고 부재의 공간인 '진공'을 세계의 본질이 존재하는 곳으로 규정한다. 작가가 말하는 '밤의 진공으로 향한 반복된 여행'은 암흑과 같은 세계를 더 자세히 보려 함이요, 밤의 진공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가진 고독, 허무, 두려움으로 점철된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규명하기 위함이다. 그는 시각이 아닌 내면의 감각으로 그 세계를 보려고 한다. 그리고 표현하려고 하기 보다는 보이는 것을 지우면서 환원되는 그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한다. ■ 송윤섭
꽃밭 속의 뷰어 viewer in the garden_캔버스에 유채_190×150cm_2015
- 무제 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12×194cm_2015
회화의 감각
1. 밤과 진공
이재헌은 그림을 그리면서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그림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서 누군가를 막연히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그는 지금도 자신의 그림과 마주하고 서서 아직 본 적 없는 그림을 기다린다. 《밤의 진공》은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은유다. 이재헌은 밤으로서의 “미지의 영역”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하게 될 “어떤 그림”을 생각하고 있다. 실체 없는 그것과의 만남은 죽음과도 같은 현실 너머 고립의 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질지도 몰라, 그는 다다를 수 없는 “진공” 상태의 시공을 불가능한 현실에서 찾고 있다. 이를테면, 어둠으로 꽉 찬 밤은, 베일에 둘러싸인 현실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불확실한 “형상들”의 출몰을 간혹 돕는다. 이재헌은 미지의 형상들이 실존하는 밤의 시공을 상상하며, 그것을 사유하는 불확실한 주체로서의 화가 자신에 대한 자각을 시도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 그리는 행위의 감각적 경험과 그 결과로서의 그림이 지닌 감각의 또 다른 경험을 견주며 의식한다. 이때, 그리기의 행위(몰입의 행위)와 표현된 형태(미지의 영역) 사이에서 스스로를 자각할 만한 감각의 층위를 좇는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감각에 대한 탐구”라 할 만큼 회화 연구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5년 만에 여는 개인전 《밤의 진공》에는, 그만큼 긴 시간동안 누적된 그림들이 시차를 덜고 같은 자리에 펼쳐있다. 그는 누군가에게 보이지 못한 그림을 작업실 한 편에 두고, 그의 표현대로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는붓질로 “같은 시간들”을 보내왔다. 작품 제목에서 드러나듯, 2014년부터 2018년에 걸쳐 그가 그려온 그림은 대략 “형상,” “꽃밭,” 그리고 “나”로 압축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련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 “회화”에 대한 사유를 전시 공간을 통해 구체화하고 있다. 때문에 그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누군가는 그의 그림 앞에 서서 “어떤 그림”을 기다려야 한다는 주체로서의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할 수도 있다. “형상,” “꽃밭,” “나”라는 단어가 포섭하는 이미지들을 앞에 두고, 저 사각의 틀 안에서 수없이 교차하고 있는 “어떤 순간”의 형상에 집중할 때 알 수도 있는.
자, 어디로 먼저 진입할 것인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하나의 벽을 가운데 두고 거의 대칭을 이루며 양쪽으로 나뉜 두 개의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몸에 밴 지각작용에 따라 시계바늘이 지나가듯 왼쪽 벽을 따라 걷는다. 벽에 붙은 그림에는, 누군가가 있고 꽃이 있고 또 어떤 특정할 수 없는 장소가 있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이미 돌아 나온 공간을 의식하며 순방향의 동선에 따라 전시장의 가장자리에 맞춰 걷는다. 꽃이 있고 누군가가 있고 어떤 특정할 수 없는 장소가 있다. 또 다시, 출발점에 섰다. 그리고 생각한다. 하나이면서 두 개인 불투명한 장소에 갇혀, 어쩌면 나는 거꾸로만 걷다가 성급하게 빠져나왔을지도 모른다. 공간의 논리를 다시 가늠하면서, 나의 결정을 바꿔본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아니 무엇을,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 첫 발자국 위에 다른 동선을 그려본다. 공간과 그 안에 서서 공간을 감각하고 있는 나 사이에 희미한 긴장이 감지되고, 그것은 공간의 논리를 구축하는 벽 위의 그림들과 감각적으로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혼잣말처럼 되뇌어 본다.
나 i oil on canvas 53x45.5cm 2018
2. 형상과 배경
이재헌의 그림은, 오래 전 위대한 화가들이 좇던 “감각의 실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특히 그가 말하는 미지의 영역으로서 오늘날의 회화적 가능성은, 지난 세기에 급진적인 회화의 목표로 제시된 바 있는 감각의논리 위에서 다시 모색된다. 예컨대 《밤의 진공》이 설정한 시공은 “감각 존재로서의 회화”를 실현하기 위해 현실에서의 현실을 넘어선, 이를테면, 주체-작가와 관객-의 초현실적 몰입과 비인간적 경험을 강조한다. 이는 자신을 초월한 지각과 정서, 그리고 그것이 촉발시키는 “소외된 존재의 순수한 감각”에 대해 말한다. 이때, 이재헌은 “형상”과 “배경”을 자신의 회화에 있어서 중요한 구성 요소로 제시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형상에 대한 회화 연구는 그의 작업 전반에 걸쳐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어 왔다. 그가 표현하는 형상(figure)은, 세잔(Paul Cezanne)과 베이컨(Francis Bacon)이 중요하게 인식했던 것처럼 구상(figuration)에서 벗어난 고립의 상태 혹은 서사로부터의 배제와 분리를 적극 시도한다. 여러모로 베이컨의 회화 연구 과정을 떠올리게 하는 이재헌의 작업은, 언뜻 그 오랜 사유에 대한 긍정적 유희와 논리적 분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이재헌의 <꽃밭 속의 형상>(2014-2015)을 보면, 누군가의 초상처럼 보이는 불확실한 형상이 캔버스 안의 어떤 장소(꽃밭) 속에 고립되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 고립이다.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그/그녀”의 신체는 그려졌다가 다시 지워진 형상으로, 배경을 이루는 임의의 틀에 갇혀 녹아내리고 있다. 여기서 형상에 대한 배경으로 제시된 장소는, 형상과 배경 사이의 비서술적 “관계”를 설정하는 일 말고는 다른 일이 없어 보인다. 그 장소라는 게, 사실 재현으로서의 실체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그림에는 그리기가 됐든 지우기가 됐든-이재헌은 자신의 회화 표현 방법 중 그리는 붓질과 지우는 붓질을 구분해 각각 “선언하는 붓질”과 “회의하는 붓질”이라는 표현을 썼다- 형상과 배경의 관계를 설정하는 “붓질”만이 명확한 사실로 존재한다. 어쩌면 이 작업의 참조가 되었을지도 모를, 베이컨의 초기 회화 <풀 속의 두 형상 Two Figures in the Grass>(1954)을 보자. 풀 속에 서로 뒤엉켜 있는 두 형상은 각각의 윤곽이 예측할 수 없게 뒤섞여 하나의 형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뭉뚱그려진 덩어리로 보인다. 그 형상(들)이 놓인 장소로서의 풀은 들뢰즈(Gilles Delouse)의 설명대로 “비의지적인 자유로운 표시들”이자 “무의미한 터치들”로 수렴한다. 베이컨의 그림에서 “비의지적 표시”는 일체의 구상적 요소를 제거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는다.
비슷한 맥락으로 볼 때, 이재헌의 그림에서 일련의 풍경처럼 보이는 꽃밭은 시간도 서사도 없는 붓질의 흔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정작 형상은 유령처럼 흐리게 지워져 있지만, “지워진 존재”로서의 실체를 갖게 된 형상은 다시 배경과 공존하고 있다. 이재헌에게 있어서, 꽃밭 “속의” 형상이라는 말은, 꽃밭과 형상, 즉 배경과 형상 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해놓는 듯 하지만 결코 어떠한 구체적인 상황을 서술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이재헌의 그림에서 형상과 배경은 선명한 윤곽선 탓에 언뜻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이 윤곽선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다), 형상은 배경을 이루는 폐쇄된 장소들 속에서 “고립된 형상” 그 자체로 생성되고 구축된다. 같은 제목의 또 다른 <꽃밭 속의 형상>(2015)에서, 배경 속에 미완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불확실한 형상(들)은 만일 그게 아니라면 단지 배경 속에 존재하는 “격리된 실체”로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처럼 형상과 배경 간의 불투명한 공존은, 적어도 캔버스만큼 폐쇄된 장소 안에서 자기의 “신체”를 서로에게 통과시킬 때 지각되는 주체-작가와 관객-의 감각 경험에 크게 기여한다.
꽃밭 garden_oil on canvas_190x150cm_2016
꽃밭 garden oil on canvas 각각150x130cm 2016
3. 색채와 윤곽선
같은 해에 제작된 세 점의 <꽃밭>(2016) 연작을 보면, 그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던 “형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형상이 빠진 배경,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풍경 그림에서는 일체의 판에 박힌 대상들을 화폭에 옮겨야 하는 작가의 극심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꽃(만)을 그리기로 한 이재헌은, 아마도 그가 이미 봐왔던 꽃의 상투적인 이미지로부터 벗어날 감상에 한껏 빠져있었을 테다. 그가 그린 꽃은,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꽃밭은, 형상과의 관계 속에서 그가 무의미한 터치들로 구축해왔던 배경의 “회화적 특징”을 더욱 증폭시킨다. 이를테면, 유독 색채와 윤곽선이 강조된 <꽃밭> 연작은 회화 행위(과정)와 회화적 표현(결과)이 두 주체-작가와 관객-에게 동등한 감각으로 체험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때, 그림이 매개하는 주체 간의 감각 경험은, 색채가 만들어내는 형태들과 윤곽선이 가두는 덩어리들이 화면에서 서로 충돌하며 탈/구축될 때 우연히 자각하게 되는 일련의 정신적 긴장감 같은 것이다.
색채와 윤곽선에 대한 주체의 감각 능력을 크게 부각시킨 일련의 회화 연구는, <꽃밭> 연작처럼 형상이 배제된 배경으로서의 풍경에 주목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배경이 없는 형상으로서의 인물초상에서도 계속 다뤄졌다. <나>(2016)와 또 다른 <나>(2018)를 보면, 회화의 표면에 부유하듯 떠 있는 흰색의 윤곽선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가만히 보면, 이 선들은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채색된 형상을 바탕면으로부터 분리시켜놓는다. 또한 극단적으로 회화 공간 내부에 가상의 환영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이재헌의 그림에서 강조된 윤곽선의 효과는 형상과 바탕면 모두 독립된 색의 실체로만 가늠케 한다. 요컨대, 일련의 윤곽선은 일체의 구상적 효과 혹은 서술적 전개를 위해 애쓰지 않고, 도리어 형상과 배경의 논리적 관계를 지우려 하거나 명확한 시점을 흔들면서 교란시키는 일을 꾀하고 있다. 마치 이재헌이 “지우는 수법”으로서의 무의미한 터치나 마른 붓질에 끌렸던 것처럼 말이다.
<무제>(2015)와 <소년>(2017-2018)에서는 조금 더 명확하다. 여기서, 윤곽선은 색 덩어리들을 사방에서 휘어 감싸면서, 채색된 면들을 분열시켜 임의의 불확실한 형상들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세 형상>(2017)은 아마도 그런 정황들 속에서 나타난 종합적인 결과일 것이다. 종교화 형식을 차용한 그림의 구조를 살펴보면, 형상과 배경 또는 색채와 윤곽선이 충돌하며 공존함으로써 불가능한 의미의 연쇄작용을 복잡하게 함의하게 된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가져와 종교적 상징과 중첩시킨 세 개의 형상은, 앞에서 살핀 <꽃밭 속의 형상>처럼 특정할 수 없는 윤곽 안에 스스로를 맡긴 색의 덩어리들처럼 또 다시 미지의 영역으로서 회화의 감각적 실체를 환기시킨다. 이번 전시 제목인 “밤의 진공”이 명시하듯, 이재헌은 오늘날의 회화적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면서 그 답을 회화의 표면에 축적돼 온 감각적 경험에서 찾고 있다. ■ 안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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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밭 속의 형상 figure in the garden_캔버스에 유채_190×150cm_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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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재의 실재
- 대화로서의 그리기 ● 모든 예술 작품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화다. 이재헌은 그리는 사람, 그림으로 대화할 것으로 여겨지는 이다. 촘촘히 이어지던 전시들이 2013년 이 후 끊긴 것은 더 이상 전할 이야기가 없거나, 다른 방법으로 전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그리기'에 충실한 작가를 만나는 반가움과 더불어 '작가라기 보다는 화가'라 자칭하는 이와의 만남이 고마우면서 동시에 그런 이가 오랫동안 침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도로변, 볕이 좋은 그의 작업실이 토굴처럼 느껴진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대화의 방향 ● 침잠하는 작가는 애닯다. 이재헌이 지속해온 '그리고, 지우는' 방식의 회화들이 보여질 때마다 지워져 흐릿하게 형태만 남은 사람의 형체가 안쓰러웠던 것은, 당연하게도 그것이 작가의 자화상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같은 방식으로 그린 자화상도 볼 수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는 2013년 이후 작품을 외부로 내놓지 않았고, 마치 메아리 같은 대화를 토굴 같은 작업실에서 계속하고 있었다. 내가 내뱉은 말을 내가 듣고, 다시 답을 주는 과정. 그러나 선문답을 주고받는 듯 한 이 과정이 마냥 애닯지만은 않은 것은, 그가 말하는 지우는 붓질이 단순히 지우고 뭉개며 형태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되려 지워진 형태를 명확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없어진 형태 위에는 여러 겹의 층위가, 시간이 쌓여있지 않은가? 이것이 그가 작업실에서 주고 받은 대화가 의미 없는 혼잣말이 아닌 이유다. 이재헌은 지우는 붓질을 '회의의 붓질'이라 말한 바 있지만, 거듭된 '회의'는 성찰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작품 속에 등장하는 흐릿한 형체만 남은 사람은 소멸하는 자아이며 동시에 성찰하는 자아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없어진 형태는 되려 단단한 그리기의 반증이 된다.
조각 같은 그림 ● 디지털 시대의 소멸하는 자아와 의미만 남은 실존, 실재 같은 단어들은 디지털 자료로만 남은 예전 작업 이미지들과 전시 소식들과 겹쳐져 역설적으로 더 또렷하게 '오늘의 이재헌'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러나 깎아내어 형체를 만드는 조각을 공간을 만들어 형체를 드러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면, 이재헌의 작업 속에 등장하는 지워져 흐릿한 사람의 형태와 얼굴이 작품 속에서 공간을 만들어, '부재하는 것의 실재' 또는 '비어있는 형태'를 명확히 하는 작업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비어있음으로 실재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 흐릿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부유하는 존재로 읽힐 수 도 있고, 비어있기 때문에 통로로 기능하거나 가능성으로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도 있다. 그러므로 작품 속 흐릿한 사람은 역설과 부조리함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초상이다. ■ 함성언
소년 boy oil on canvas 116.8x91cm 2017-18세 형상 three figures oil on canvas 190x150cm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