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lle belle heures 어떤 희한한 시간들
심상미展 / 沈相美 / Sim Sang-mi / mixed media / 2011.01.18. - 2011.01.30.
심상미_1_목재, 금속, 가변설치_920*1820*300mm_2011
인간은 공간을 추상화 시키는 습관을 지닌다. 공간이라는 개념은 어렵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공간에 대한 시선을 조금만 비틀면 무수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는 추상적 공간은 정신적인 곳에 존재하게 된다. 인칭 간의 공간이 존재하고, 그 공간들은 관계된 또 다른 공간을 지닌다. 1인칭의 시점의 공간과 2인칭, 3인칭, 전지적인 시점까지 공간과 공간의 교집합에 대한 인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공간은 기억으로 잔존하게 되는데 남겨진 기억은 공간을 다시 재구성한다. 심상미 작가는 조건이 되는 외적공간과 확장되는 내적공간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단언한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느끼는 현재에 대한 상실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 상실감은 또 다시 현실의 공간으로 재현된다. 자아의 안과 밖에서 무수하게 생성되는 공간들을 모으고, 결합하고, 지속시키고, 해체하면서 나는 존재하게 된다. 결국 공간은 실재와 허구의 교집합 내에 인간의 삶과 죽음을 포함하면서 두 개념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수많은 공간은 저마다 해석되길 기다리는 기억들을 담고 있다. 나의 기억, 타자와의 기억, 사자와의 기억들을 추억하게 되면서 생식이 빠른 개체 늘림처럼 새로운 공간은 가속화되며 무한으로 생성된다.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화」에서 “공간화 된 공간에서 공간화 하는 공간으로 옮아가는 것” 이라고 했듯이 공간의 시퀀스는 옮기고 옮겨지며 일종의 전염병처럼 언제, 어디에, 누구를 막론하고 번져간다. 그런 공간은 주체에 의해 삶을 부여받는다. 추상적으로 작동을 하는 공간들은 심상미 작가에게 어떤 삶을 부여 받았나?
심상미_1_목재, 금속, 가변설치_920*1820*300mm_2011
절대적인 것은 없다. 심상미 작가는 내적공간과 외적공간의 경계를 허물어트리는 작업을 강행했고, 공간(door)을 넘나드는 흡사 초능력인간의 대안으로 소리(sound)를 배치한다. 소리(sound)를 통해 심상미 작가는 <작품>에서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보다는 추상적인 관념에 대한 고찰의 재미를 건넨다. 추상적인 관념에 대한 고찰은 불변성, 연속성, 비가역성 등의 시간의 특성에 대한 전복으로 다시금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다.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 우리는 보지 못 한 것을 미리 가지고 있는 앎을 최대한 동원해 상상한다. 자칫 그 상상은 사실이 되어버린다. 이런 착각이 포풍착영을 허망하지 않게 만드는, 이번 전시의 포인트라 하겠다.
심상미의 포풍착영(捕風捉影)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든다는 뜻으로, 허망(虛妄)한 언행(言行)을 이르는 말
기억(=공간)의 수박(囚縛)
잃어버린 경험들은 기억이 되고 내적공간으로 생성된다고 위에서 말한 바 있다. 심상미 작가는 이번 전시에 앞서 조부를 잃었다. 심상미 작가는 그로서 또 하나의 내적공간을 갖게 되었고, 슬픔에 찬 내적공간을 외적공간으로 재현하는 데 역설적인 태도를 내세운다. 문이라는 매개를 통해 가상으로 생성된 공간에 기억을 수박한다. 조부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팔다리가 현현하게 말라갔고, 그 곁을 지키며 들을 수 밖 에 없었던 숨소리. 연명하기 위한 생명의 숨, 그렇게 나마 간직하고 싶은 그 생의 마지막 숨소리를 가두는 행위로서 심상미 작가는 위안을 찾고 만족한다. 수많은 내적공간으로 존재하고 있을 조부와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재현된 공간에 존재한다면 좋겠다만은 조부의 임종 전 며칠이라는 슬픔의 공간이 기억의 잔해들로 인해 모조리 잠식되어 이전의 기억은 공간성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앞으로는 절대 동일한 공간 속에 존재 할 수 없다는 슬픔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부정에 대한 병적(病的) 미화(美化)
전 세계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윤리와 올바름에 대한 기준들에서 벗어나 스펙타클을 즐기려는 욕망이 사회 속에 팽배한지는 이미 오래다. 다양한 미디어들은 종전보다 더 자극적인 것들을 추구 하며 자본에서의 승리를 갈망한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 중 서정적인 스토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해치고, 죽이는 스토리가 넘쳐나는 사회 속 에서 잔인한 재현의 과잉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사회는 근본적으로 평화, 자유, 사랑이 파괴 되는 것에 대해 부정한다. 그러면서도 전쟁, 억압, 증오를 자행하는데 여기에서 심상미 작가는 그 부정적인 현실을 아예 미화시켜 버린다. 기억이 생산되고(현상의 진행) 내적공간으로 재현되는 사이, 그 어느 순간에 현실을 재구성해 버리는 새로운 단계가 생성된 것이다. 이 위험한 행위가 심상미 작가에게는 안정을 취하는 방식이 되었다.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내적공간들은 심상미 작가의 내공에서 비롯되어 아주 아름답게 재구성되는 것이다. 심지어 심상미 작가는 그 위험한 행위 자체에서도 도피한다. “내가 살았던 곳은 참 아름다운 곳 이예요.” 라고 말할 수 없는 인간사회는 무시무시한 공상가를 생산해 내는데 적합한 공장이 되어버렸다. ■막걸리
어떤 그럴듯한 팔이, 어떤 희한한 시간이, 거기에서 나의 잠과 약간의 움직임이 유래하는 것 같은 저 지역을 나에게 돌려줄까? Quels bons bras, quelle belle heure me rendront cette région d'où viennent mes sommells et mes moindres mouvements? -「도시들Ⅱ(Villes)」아르튀르 랭보 (J.A.Rimbaud, 1854-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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