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3 >> MAK
왁구바리셰이크展 (권재한 權宰漢 | 최윤희 崔允僖 | 이동훈 李東勳 | 임경미 林勁尾 | 노종남 盧宗男 | 이상규 李相圭)
mixed media / 2011.02.19 - 2011.03.01 / opening reception 02.19 pm 5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 / 3 channel video installation / 2011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 / 3 channel video installation / 2011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 / 3 channel video installation / 2011
Abyss / installation / 2011
Abyss / installation / 2011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 막연하다. 막연한 연못에 무엇이 빠졌을까? ...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오래된 연못이 지금도 어딘가에 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현대인)들이 겪는 가장 막연한 고통은 무엇일까? 왁구바리셰이크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현대인들을 괴롭게 하는 연못 속의 침전물을 “불안”으로 꼽았다. 불안은 두려움 전의 정신적인 지속상태로 암암리에 우리를 괴롭힌다. 의식하지 않는데 의식하고 있는 것, 두려운 줄 몰랐는데 두려워 하는 것 등이다. 왜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여러 종류의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앞서 불안이 현대인을 괴롭게 하는 요소라 했지만 사실 왁구바리셰이크가 이야기 하는 불안은 현대인들이 늘상 괴롭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너무나 빨리 스쳐가거나 너무 깊숙한 곳에서 베어 나와 무엇인지 모르겠는, 안개 같은 것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보는 고통의 원인은 무명(無明)으로서 무명이란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바로 고통의 원인’ 이라는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 구조를 지니고 있어, 실제로 고통을 벗어나기 전에는 무명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도록 되어있다.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다만 문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1 R.May에 의하면 공포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위험에 대한 반응인 반면에 불안은 불특정적이며 애매모호하며 대상이 없는 위험에 대한 반응이라고 했다. 이처럼 공포는 위협을 주는 대상을 알고 있어서 위협적인 상황에서 대응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지만 불안은 그 대상이 모호해 스스로 자각하고, 대응하기 보다 오히려 오관이 희미해져 현기증까지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모름으로 불안이 형성된다.
이에 왁구바리셰이크는 불안의 시작을 알아 보고자 했다. 극명한 해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왜?’라는 질문 만으로도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작가들은 불안의 연못을 만든다. 관객들의 눈앞에 놓여 진 연못은 특정적인 불안을 담고 있다. 무명(無明)하여 겪는 불안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경제적 현실 속에 선 현대인들에게는 사치일 수 있다. 하지만 꼭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근원적인 불안의 심연에서 수면위로 코를 내밀어 숨 쉬어 보게 되는 것만으로도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다시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왁구바리셰이크는 ‘왁구바리’라는 명사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주로 평면 작업을 해온 6명의 작가로 구성된 단체다. 그들은 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평면 작업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작업을 위해 단체를 만들어 프로젝트들을 직접 기획/진행 하고 있다. 프로젝트들은 작가 단체인 왁구바리셰이크 뿐만 아니라 작가들 개개인의 작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작품의 소재나 내용, 실현 방식 등에서 다양한 실험을 가능케 하고 전시의 공간을 연구한다거나 작업의 관계에 대한 연구, 심지어는 작품 담론의 깊이를 쌓아가는 데 있어서도 작가들의 단체 활동은 활성제이자 각성제가 된다고 말한다. 앞선 두 프로젝트에 이어 이번 플레이스막에서의 작품 활동도 6명의 작가들에게 좋은 반향이 되었기를 바래본다. ■막걸리
현대인들은 고독한 군중의 사회 안에서 어딘가에 잠재하고 있을 내면적 불안을 안고 산다. 운과 환경, 사고, 병과 죽음의 공포, 우연과 뒤늦은 발달, 적절한 시운과 불행 모든 것이 불안의 대상이며 개개인에게 있어서 그 기분들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내재된 불안의 무엇이라 설명하기 힘든 그리고 예측하기 힘든 불측지연(不測之淵)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못이란 뜻으로, 위험(危險)한 곳이나 불안(不安)한 것의 비유(比喩ㆍ譬喩) 이라는 말로 짧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연못 속에서 연못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그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하는지 또한 역시 막연한 일이다. 우리는 작업의 결과물에서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싶다. 결국 불안이라는 정서는 행복한 일상 안에서도 함께하는 것이며,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 인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불안을 느낀다고 했으니... ■왁구바리셰이크
- 칸트를 통해 칸트를 넘다 - 홍성기(아주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749&category_type=se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