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푸가: 김은진의 그림에 대하여
김은진의 개인전 <푸가 Fugue>는 회화의 작업 과정을 ‘푸가’라는 음악적 형식에 비유하며 ‘그리기’에 대해 탐구한다. ‘도망’, ‘탈주’를 뜻하는 푸가는 각각의 파트가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동시에 주제를 주고받으면서 거대한 줄기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대위법(對位法, counterpoint)의 한 종류로, 소리들이 계속 쫓고 쫓기는 구조로 진행된다. 카논(canon)이 돌림노래처럼 어떤 주제를 두고 정확한 규칙과 간격으로 모방하는 형식을 말한다면, 푸가는 엄격한 규칙을 따르지만, 주제와 변주가 반복되고 발전되는 형식이다. 작가는 이 같은 푸가의 형식을 ‘응답’의 구조로 파악하며 이를 “캔버스 안에서 주 제스쳐와 이에 화답하는 제스쳐가 대화의 형식으로 반복되어 그려진 것”으로 설명한다.
많은 화가가 ‘푸가’라는 음악적 ‘형식’을 직접 다루어왔다. 스스로 회화를 음악과 비교했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역시 <푸가 Fugue>(1914)라는 제목의그림을 남겼다. 그는 음악의 대위법에 상응하는 회화의 조형적 규칙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에, 추상 회화를 음악적 요소에 비유해서 서술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회화에서푸가의 형식으로 자신의 회화적 표현을 은유하려 했던 시도는 음악의 힘을 빌려 새로운 미술 언어를 탐구하려 했던 칸딘스키 외에도 있었다. 특히 20세기 초 푸가는 대상의 사실적재현에서 벗어나 추상 회화의 조형적 요소를 구조적으로 탐구하려 했던 화가들에게 곧잘 다루어졌던 주제이기도 하였다. 쿠프카 (František Kupka)의 <무정형, 2색의 푸가Amorpha: Fugue in Two Colors>(1912), 횔첼 (Adolf Hölzel)의 <부활의 주제에 의한 푸가 Fugue on a Resurrection Theme>(1916), 클레(Paul Klee)의 <붉은 푸가 Fuge in Rot>(1921) 등, 음악의 요소와 음악적 상태를 통해 회화의 조형성과 추상성을 말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너를 기다려_캔버스에 유채_162.2 x 130.3cm _2019
그렇다면 그림에 있어 ‘음악적인 것’ 혹은 ‘음악적 상태’란 무엇일까? 그림을 그리다 보면 화면에 그려지는 대상보다, 화면과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각에 더욱 집중하는 순간이 있다. 화가들은 종종 이 상태를 ‘음악적인 것’과 연결 지어 이야기하곤 한다. 일종의 즉흥 연주 같은 이 순간은 선과 색이라는 음(音)들을 무작위로 나열하는 것 같으면서도화면 안에서 모티프를 구성하고 반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림을 그려본 사람은 누구나 했을 법한 생각이겠지만, ‘그리기’라는 상태는 그리는 이에게 ‘그리기’의 정당성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든다. 산을 오르는 이에게 왜 산을 오르는지묻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질문처럼, 흰 바탕의 네모난 화면과 ‘그리는 나’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지, 선택한 색상이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 형과 색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묻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린다는 것에 관한 생각은 자연스레 예술의 형식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향해가기 마련이다. 발생적인 측면에서그림은 어떻게 생겨나는지 질문하며 ‘그리기’를 되새김질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그릴 수 없는 지경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이는 마치 언어의 형식과 의미의 자의적 결합을 문제시하는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대상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점, 선, 면, 색과 같이 추상적 요소로 화면을 구성하며 그림의 본질을 질문하는 것은 ‘언어적인 것’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예술 언어는 ‘보편 언어’이기 이전에 ‘개체 언어’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리는 이에게 그림은 아마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과 감각적 인식을 가장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비언어적인 표현 매체이자 형식일 것이다. 또한, 그린다는 것은 그리는 이의 몸과 정신 혹은 관념과 실재가 그리는 과정에서 합일된 감각을 통해 드러나길 지향하는 활동 혹은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향한 미적 활동으로도 말할 수있다. 예술적 직관은 경험과 훈련의 소산이기 때문에, 그리는 이에게 ‘그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의 본질적인 감각들을 되찾는 수련의 과정일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그리는이는 내면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대상을 재현하지 않으며 내적 감각을 좇는 추상 회화는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모사하지 않는 음향 기호들 사이의 관계로 구성되어, 가치 있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음악이 가진 추상성과 연결된다.
날다 _캔버스에 유채_90.9 x 72.7cm _2018
김은진 역시 음악적 요소와 그것이 지닌 추상성으로 ‘그리기’에 대해 말하고자 ‘푸가’를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더욱 주목한 것은 푸가의 형식적 구조보다는 ‘도망’과‘탈주’라는 푸가의 어원인듯하다. 작가는 그리는 과정을 제스쳐 사이에 발생하는 대화와 응답으로 그림의 구도를 끌고 가고 있다. 그리는 것에 대한 자문자답 같은 이 구조는 이중적, 자기 분열적일 수밖에 없다. 주체성의 시각을 기반으로 그림을 그렸던 과거 모더니즘 회화가 남긴 시각 경험을 바탕으로 그 형식에 내재하여 있는 탈주의 지점 안과 밖을 넘나드는 것은 오늘날 회화의 기저에 깔린 태도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물감과 붓질에 대한 의식, 실존적 붓질의 영역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리는 나’에게서떨어져나와 회화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그리는 이를 무력감에 젖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비재현적인 추상 회화는 견고한 현실을 직접 반영하지도, 삶의 다양한질감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회화에서 추상과 구상,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언어 사이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출해 내는 것, 혹은 미학적 진보와 정치적 진보가 합일된 이상적 상태를 도출해내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논의는 이미 회화의 역할과 유효성에 대한 해묵은 질문들을 뒤적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회화는 회화 자체를 은유하는형식으로 그 자신을 보여주거나, 유희적으로 재창안하며 이중의 거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화가의 주체성을 완전히 말소시키지는 못한다. 어찌 보면 그것이 그리는 이의 마지막/유일한 믿음일지도 모른다. 회화의 연약함을 알아버린 자각과 함께 불완전한 주체의 존재성을 전제로 회화의 정체성을 탐험하는 것은 단지 모더니즘의 매체 담론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김은진의 회화에서 보이는 자문자답의 이중적 구조는 그리는 주체를 드러내기도, 은폐하기도 하며 회화라는 매체가 가진 가능성을 실험한다. 자문자답이란 대화의 형식은정반합의 과정이거나, 독백일수도 혹은 격렬한 토론일 수도 있다. 화면 안에서 작가는 회화의 관습(convention)을 반복하거나 적절하게 현시대의 시각적 감각에 맞게 변형하며보편성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작가는 모더니즘의 보편적 회화 언어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편성에 관해 묻고, 의심하며, 답하는 회화적 제스쳐를 통해 기존의미 작용을 지연시키며, 그 지연된 시간 속에서 회화의 의미와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그렇다면 김은진의 ‘푸가’는 어떻게 작곡되며, 어떻게 들릴까?
그림 속 그림 Picture in Picture _캔버스에 유채_90.9 x 72.7cm _2018
김은진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회화의 형식은 사각형 프레임을 강조하면서도 캔버스의 틀을 무화시키는 듯한 화면의 가장자리를 둘러친 평평한 붓질이다. 빠른 속도를 가능케하는 묽은 농도로 희석된 물감을 붓에 묻혀 화면의 외곽을 두른 이 붓질은 화면의 중심부와 외곽을 물감의 농도와 붓질의 속도로 구별 짓는다. 묽은 농도의 물감은 자연스럽게 캔버스 천에 스며들거나 흘러내려 중심부에 표현된 유화 특유의 두꺼운 질감 및 물감의 엉킴과 대비되는데, 이 대비는 화면 안에서 공간성을 부각하는 효과를 준다. 일종의 농도 차로화면의 공간성을 구현한 이 효과는 농도를 묽게 하여 색면의 가장자리들을 차츰 소멸시키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가 구현해낸 회화적 공간성을 염두에 둔 느낌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파울 클레의 <리듬에 관하여 Rythmique>(1930)를 떠오르게 하였다.
클레의 <리듬에 관하여 Rythmique>는 즉각적으로 푸가의 형식이 떠오를 만큼 음악적 요소가 강하게 느껴지는 그림이다. 캔버스의 가장자리는 번트 엄버(burnt umber)와 같은 흙색으로 바탕칠 되어있고, 중앙에는 여섯 줄로 이루어진 가로선이 정렬되어 있다. 그 가로선 안에는 균등하지 않은 크기의 검은색, 회색, 흰색의 직사각형이 불규칙적으로 반복된다. 각각의 색을 리듬의 길이 혹은 소리의 강도로 치환하여 생각해보면 마치 조형적 악보를 읽는듯하다. 음악적 시간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박자와 리듬이 느껴지는 이 작업은클레 특유의 음악적 서사성을 느낄 수 있다. 김은진의 작업 역시 선 긋기의 속도와 색채의 강약, 캔버스 위에 물감이 묻은 붓으로 뭉개거나 혹은 비비거나, 가볍게 치는 붓터치의강도 등을 통해 화면 안에서의 리듬을 구사한다. 그러나 클레의 작업이 오선지 위에 그려진 음보로 읽힌다면, 김은진의 작업은 다섯 개의 선이 없는 오선지 위에 그려진 것과 같은느낌을 자아낸다. ‘오선이 없는 오선지’라는 어불성설 같은 이 상태는 클레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시간성을 의미한다. 클레의 그림이 음악의 선형적 시간성을 바탕으로 한다면, 김은진의 회화에서 드러나는 시간성은 ‘찰나의 시간’이다. 사실 회화란 매체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정지되어 있지만, 마치 한꺼번에 ‘조화롭게’ 쏟아지는 음들처럼 찰나의 시간/속도로 무언가를 감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음악적 시간과는 다른 ‘회화의 시간성’은 무엇일까?
Amazing Day_캔버스에 유채_90.9 x 72.7cm _2018
흔히 회화에서 나타나는 시간에 대해 말하고자 하면 바니타스와 같이 ‘시간성’ 자체를 소재로 한 그림이거나, 두루마리 그림 양식에서처럼 일정한 방향성으로 공간을 시간화하는 방식, 혹은 파편화된 이미지를 한 화면에서 중첩하여 다층적인 시간을 그려낸 그림들을 떠올린다. 혹은 화면에서 우연성을 도입하거나, ‘기억-재현’의 시차에 의해서 발견되기도 한다. 또한,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소설에서 따온 ‘무시간성’(atemporality)이란 용어로 동시대 회화에서 새로운 추상의 ‘경향’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동시대성이 무의미해지며 모든 시대적 양식과 모티브가 공존하는 (비)역사적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김은진이 주목하는 ‘회화의 시간성’은 ‘회화적 감각의 시간성’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화가-주체’에 전적으로 의지하는듯한 이 시간성은 김은진의 회화에서 긍정되기도, 부정되기도 한다. 빗금을 연속적으로 그은 붓질 위에 마치 ‘취소선’을그은 듯한 형상을 김은진의 작업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선을 긋는 순간은 화가의 시지각(vision)이 몸짓(gesture)이 되어 나타남을 온전히 긍정하지만, 바로 그 순간을 의심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문자답’의 구조는 김은진의 작업에서 작가의 고유한 조형성을 만들어나간다. 자문자답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답의 시차, 그리고 자신의작업을 거리감을 두고 메타적으로 바라보는 것, 사실 이 과정은 화가에게 특별한 시간과 거리감이 아니다. 회화에서 주체/객체, 능동/수동, 행위/목격 등으로 자주 설명되는 이 거리감은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면 언제나 발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은진은 그 과정을 파고들어 ‘회화적 시간’을 찾아내려 한다. 자신의 제스처를 취소선으로 지워버리고, 그 위에 다시 선을 긋거나, 뭉갠다. 혹은 밝은색의 밑색을 칠한 후 그 위에 어두운색으로 다시 덮어버린다. 그러나 지워진 선은 흔적으로 남고, 밝은 밑색은 덧칠한 어두운색 가장자리로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한 효과를 내며 색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림을 보는 이는 남겨진 선의 흔적과 빛의 새어 나옴을 통해 이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보는 이는 그린 이의 행위와 그 행위의 시간을 읽어내며 회화의 조형적 추상성을 감지한다. 작가에게 그림은 그리는 주체의 흔들림에 대한 사고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의미화가 지연된 흔적을 통해 희미한 주체성을 감각하게 할 수도 있는 매체이기도 하다. 그리는 이에게는 흔적으로 남는 ‘회화적 시간’은 보는 이에게는 그 흔적들이 시각적으로 한꺼번에 다가와 공간적으로 지각된다. 회화란 매체의 묘미 중 하나는 음악처럼 선형적 시간에 끌려다닐 필요 없이, 보는 이가 랜덤하게 접근할 수 있단 점에 있다. 이러한 회화의 개방적 구조가 주는 ‘찰나의 순간’을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에서 구현하려 한다. 김은진에게 ‘회화적 시간’은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향한 숫자로 시간을 인지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틱-톡(Tick-Tock)과 같이 시계의 초침이 내는 소리를 통해 시공간을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초침이 한번 움직일 정도의 시간 동안 그림이 주는 ‘순간의 경험’을 구현하기 위해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기도 하며 ‘화가의 정체성’과 ‘그린다는 것’에 관해 묻고 답한다. 질문과 대답을 끊임없이 변주해가면서, ‘찰나의 푸가’를 작곡하듯이.
● 장파/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