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집의 벽 속에 있는 빈 공간을 떠올릴 때가 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빈 공간.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작은 공간에 공기가 있다. 수십 년, 수백 년을갇혀있는 공기가 있다. 건축될 당시의 기후와 계절과 냄새를 간직한 공기가 거기 있다. 아무도 관심이 없겠지만 거기에 있다.
얼룩, oil on canvas, 162x112cm, 2018
2.
학교 수업을 마치고 차를 타러 가다가 봄기운에 홀려서 뒷산 오솔길에 접어들었다. 얇은 봄꽃들 사이로 나무 한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진 듯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있다. 빈종이를 꺼내 나무를 그리다가 각도에 따라 달라 지는 나무의 모습에 새삼 놀란다. 나무 아래로 다가가서 위를 올려다보니 완전히 다른 모습의 나무가 있다. 나무의 진정한 모습이란 것이 있을까. 우리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사람이나 인간이라는 말을 통해 떠올리는 그것은 무엇일까. 보편적 인간이라는 말은 가능한가.
검은 산, oil on linen, 116.5x80cm, 2019
검은 산 2_oil on canvas, 145.5 x 112cm, 2019
3.
뇌과학에 따르면 언어는 뇌에서 일어나는 일의 10%정도 밖에 표현을 못한다고 한다. 언어의 해상도가 인식의 해상도보다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인식하거나 기억하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그림으로 표현한다.
만남, oil on canvas, 130x162cm, 2019
사람들이 내놓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이 길을 오갔을 수많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행했을 갖가지 일들이 떠올라 그만 아찔해진다. 유전자를 생각해보면, 나는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산은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덩어리인가. 나무도 풀도, 도대체 오래되지 않은 것이 없다.
헤어짐 , oil on canvas, 162x260.5cm, 2019
봄 산, oil on canvas, 130 x 162cm, 2019
세계는 온갖 형태와 색으로 가득하다. 그것들은 어둠의 막 속에 갇힌 듯 고요하다. 나는 색과 형태의 내부로 들어간다. 말로 꺼내지 못하고 응어리진 내 속의 얼룩들이 깨어난다. 얼룩들이 어둠의 막을 뚫고 나오기 시작한다. 얼굴이 흘러내리고 풍경이 일렁거린다.
바위_oil on linen, 116.5 x 80cm,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