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전
March 7 – 28, 2015
자화상_acrylic, oil pastel on panel_53x38(cm)_2015
세 개의 방 - 슬픈 샤먼의 울음소리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던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정신세계 속에 나타나게 된다.
-에스키모 샤먼, 이그주가르주크
미술사에 있어서 개인, 자의식의 위치는 특별합니다. 예술이 단순한 개인 사고의 재현체계가 아니라 그 작가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 문화적 상황과 반응하면서 만들어진 통합적 형성 체제라면, 그 예술을 재현하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인은 진보와 후퇴 가운데 움직이는 군중 속의 하나 또는 군중과 구별되는 하나로 이해될 듯합니다. 특히 미술사에서 양식사는 위 개체가 사회와 반응하는 결과를 합의적으로 이미지에 재현함으로써 그 고집스러운 유지, 또는 변화의 에너지를 통해 사회 속에 갇힌 개인과 그것에 저항하는 개인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합니다. 시대적 상징으로 표현되는 양식은 그 시대의 관념, 감정, 사고체계 등을 흡수합니다. 하지만 그 양식은 변하는 인간의 역사에서 언제나 한계성을 나타내고 그것을 느낀 소수의 사람들에게 도전을 받고 해체와 교정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시대에 도달해왔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문화사를 거칠게 또는 아름답게 걸어온 자크 바전은 세계사적 흐름과 문화사적 반응이 해방과 원시주의로 관류하는 '자의식'의 발전과정이라고 표현하였고 시대의 양식은 위 관념들을 담아 표현의 틀로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개념 중 욕망(id)과 금지(superego), 그리고 이에 적응하는 자아(ego)의 역할은 20세기 이후 사회 속의 개별적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울림으로 인간의 사고, 감정 체계를 관류해 예술을 포함한 인문, 자연과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세 개의 방_ 다채널 영상_가변설치 _2015
선승전 작가는 프로이트가 발견한 이후 정신분석가가 임상에서 경험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숨을 쉽니다. 그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감각의 세계는 사실 평탄한 지형 위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 여진을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는 그런 세계입니다. 그 여진의 흐름 속에 작가는 자신의 내면 공간을 분리합니다. 흥미롭게도 작가가 선택한 실제 전시 공간은 두 개인데 제목은 세 개의 공간, 즉 세 개의 방으로 나누었습니다.
세 개의 방_ 다채널 영상_가변설치 _2015
첫 번째 공간인 막사의 공간은 심연의 공간으로 우리가 감지할 수 없지만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 또한 과거의 현재로 켜켜이 쌓여 서로 뒤엉킨 에너지와 기억이 뒤섞인 공간입니다. 세밀하게 느껴지는 감각 속에 그 욕망은 사회 적응의 대척점과 피할 수 없는 갈등을 합니다. 욕망의 변신체들은 목적 없이 떠돌아다니는 듯하는데 사회 속에서 내쫓겨진 원한의 모습을 한 채 기억의 가면을 쓰고 파괴적 에너지를 품은 채 현재 속에서 그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기억의 흐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의 흐름으론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심연의 공간의 논리는 그들만의 이야기와 에너지로 뭉치고 떨어지며 비이성의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불안과 분노, 욕망의 존재가 사회 속에서 좌절하고 재생성한 그 흔적들의 모음, 그 에너지 자체인 것입니다.
자화상_acrylic, oil pastel on panel_53x38(cm)_2015
그 흐름은 두 번째 흰 방에서 피할 수 없는 사회화의 충돌 속에서 반복적인 초상화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검은 배경에서 작가의 모습은 흐릿하지만 강렬하게 나타납니다. 세상에 비칠 모습에 대한 불안과 비치고 싶은 마음에 대한 갈등,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하는 운명의 깊은 욕망은 검은 캔버스 속에서 지나가듯하면서도 강하게 표현됩니다. 하지만 그 슬픔이란 감정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혼돈된 정체성의 혼란이 강박적으로 나열되듯 어쩔 수없이 사회화되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안정감, 즉 생존을 위해 많은 감각과 욕망의 세계를 포기해야 하고 그래서 군중 속에서 교체가능한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근원적 슬픔이 바로 이 두 번째 방에서 표현된 것입니다. 작가는 그러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자신을 버려두지 않고 자신의 감각, 감정을 찾아가며 자신만의 개별적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인지하며 그 속에서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시도를 합니다. 즉 피할 수 없는 커다란 금지의 틀 내에서 고집스럽게도 '내가 느낀 것, 내가 경험한 것'이 무엇이고 그 안에서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내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은 세 번째 방, 즉 작가가 현재 이 시점에 작가의 감각과 인지체계 내에서 경험하면서 동시에 기억의 저편으로 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이 순간'이란 관념적 공간은 현재의 감각 세계와 전의 두 공간이 함께하는 공간이며 지배와 충돌, 독립의 의지가 공존합니다. 의식이라는 허상의 흐름 속에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시간성 안에 감지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중첩되는 공간인 것입니다.
자화상_acrylic, oil pastel on panel_53x38(cm)_2015
선승전 작가는 고통 속에 슬픔의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 슬픔의 공기는 공간 내에 머물지 않고 마음 속 깊은 곳과 공명을 합니다. 그 슬픔의 울음소리는 시간을 되돌려 우리가 오해하거나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가 있는 샤먼의 존재를 떠오르게 하는 듯합니다. 문명의 필요라는 필연적 이성의 체계 내에서 자신의 감각 세계뿐만 아니라 정체성 자체를 버려야 했던 샤먼의 운명적 모습, 하지만 문명적 인간의 자의식을 비웃는 듯 수십만 년 동안 사냥꾼의 지도자로서 인류의 생존을 책임졌던 그 샤먼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신화연구가 조지프 켐벨의 연구 속에서 나타났듯 우리의 정신적 유산의 수호자요, 평범한 현상의 배후를 경험으로 느끼고 숨겨진 중심과 접촉을 할 수 있는 자입니다. 폐기될 수밖에 없었던 샤먼의 감각 세계, 버려진 정체성은 문명의 틀 속에서 고통스러운 슬픔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화상_ 필라왁스_20x30x40(cm)_2015
오래되어 각질이 되어버린 문명사회의 틀은 우리에게 질서와 안정적인 사고체계를 제시했지만 개별적 감각이 바탕이 된 개인을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 많은 선각자들은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금지와 처벌의 틀 내에서 개별적 감각을 경험했고 자의식의 존재를 위해 끊임없이 갈등하고 또는 외롭게 싸워왔습니다. 그 선각자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한 부류가 바로 예술가였고 여전히 그들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자신의 고유한 감각과 사회화의 틀 내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선승전 작가는 그런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외로움의 긴 싸움을 이 작업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투쟁은 바로 자의식의 확대로 이어져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를 형상화했으며 그 에너지의 요동은 느낌으로 우리에게 공명으로 울리는 것입니다. ■ 이현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