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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적 환상에 대한 거부

 이지혜(미술비평) 


   인간관계에서의 화해와 소통이 과연 실존할 수 있을까. 조문기는 사랑 또는 우애로 일구어지는 어떤 공동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 공동체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결 불가능 한 문제로 개별자의 삶이 잠식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조문기 작업의 기초가 된다. 운명적인 공동체가 우리의 환상과는 달리 드라마 속 갈등의 원인으로 또 불온한 주체로 상징화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가족-적’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매우 흥미롭다. “가족 사이처럼 친밀한, 또는 그런 것”이라 정의되는데 이것은 가족의 사전적 의미ㅡ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ㅡ에는 없는 친밀이라는 단어가 갑작스레 등장한다. 친밀이라는 의무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정의 안에서 암묵적으로 은신해 있는 것이다. 조문기의 작업은 이런 ‘친밀의 은신’에 대해 모성애나 부성애에 대한 믿음 혹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낭만 등이 생물학적 운명으로 발생한 근거 없는 환상일 뿐임을 시사한다. 오히려 그 환상들에서 오는 압박이 가족 공동체에게 막장 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불명예를 안겨주는 것이다. 


   칸트는 현실을 전달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며, 사유될 수 있으나 표상 될 수 없는 것의 암시를 찾는 것만 가능하다는 점이 마침내 분명해져야 한다며 뿐 만 아니라 이러한 과제에서 “언어유희”들 간의 최소한의 화해도 결코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가 지니고 있는 최소한의 화해에 대한 기대는 결국 어떠한 능력이고 이 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선험적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리오타르는 자신이 이 선험적 환상을 ‘테러’로서 지불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며 전체와 하나, 개념과 감성의 화해, 선험적이고 교류 가능한 경험에 대한 동경 등에 비싼 값을 치러왔고 긴장과 냉정에 대한 보편적 요구의 배후에서 ‘테러’를 또 한 번 시작하려는, 현실 포착의 환상을 실현에 옮기려는 분위기를 아주 분명히 느낀다고 한다. 일상성이 주는 불가피한 갈등은 결국 커다란 체제적 한계에서 시작된다고 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이 상황ㅡ각자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 간에ㅡ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들에 의해 발생한 갈등의 간극은 어떠한 ‘선험적 환상’으로도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이 기구한 공동체는 어떻게 불가피한 갈등의 족쇄를 풀고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결국 리오타르의 말처럼 ‘표현 불가능한 것’을 증거하고 대치성을 활성화 시키며, 이름의 고귀성을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화해와 동결됨의 안정감에 도취되지 말고, 도발과 도드라짐을 즐기자는 것이다. 적어도 조문기 작품에 대한 나의 해석은 그렇다. 고질적인 것을 거부해왔지만 지금은 오히려 고질적이기 때문에 애정을 갖게 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라는 작가의 말은 공시적인 작품의 행보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조문기 작가의 시리즈 연작 중 이발소 시리즈는 ‘표현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도전이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환상을 겨냥한 테러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듯 옹졸해진 주인공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테러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의 작품일수록 작가가 지니고 있었던 무위의 환상을 조용히 내려놓은 듯하다. 현실을 메타포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고질적인 것들을 즐기며 그 현상을 즐기는 멜랑꼴리한 태도까지도 비춰진다. 숨 막히는 현실과 타협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제된 안정을 위한 열망을 제거하고 공동체의 개별자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조문기의 보여주기 방식이 다소 거치거나 직설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형태론적인 부분까지도 인정을 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보호받는 개별자로써의 안녕을 보장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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