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의 각도
전수오 / drawing, installation
Sep 10 - 26 , 2015
minor star / 지본수묵담채 ,실 /31.8*31.8 /2011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꺼내고 밥을 푸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교차하며 밥을 먹는다. 이는 지극히 일상적인 범주의 행동이라 문장으로 옮기는 것이 무색하다. 하지만 누군가 ‘깍두기’라고 맘속으로 10번 불러보고 그것을 응시한다면? 혹은 숟가락에 붙은 밥알을 세어보는 것은 어떨까? 혹은 먹는다는 익숙한 퍼포먼스의 행위자에서 관람자로 역할을 하는 것은 어떤가? 이는 엄마 혹은 식사를 함께하는 이로부터 등짝스매싱을 유발할지도 모르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하고 의미를 건져내는 것은 예술가 되기의 핵심일터이다.
99.99 /장지에 먹,실 /33.4*21 / 2011
전수오 작가는 어느 날 종로3가를 지나던 중 밀집해 있는 금은방들 앞에 멈추어 선다. 잘 닦인 쇼윈도에는 99.99%라는 금의 순도를 광고하는 포스터와 홍보물들이 나열되어 있다. 금이라는 광물의 100프로에 약간 못 미치는 수치를 보면서 완벽으로 인식되는 100에 가까워지려는 일관된 열망을 읽은 전수오 작가는 우리네 삶의 형상을 발견하고 아찔함을 느꼈다고 한다.
묵포도 /지본수묵,실 /40.7*31.8 /2011
사랑 /지본담채 / 27.3*21.8 /2011
삶의 완성을 100이라는 숫자로 상정했을 때 우리의 삶의 방향은 9로 가득 찬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형상과 같다. 삶과 죽음사이에서 100이라고 외칠 수 있는 완성된 인생의 주체가 과연 몇이나 있겠냐만은 최대한 99.99999999999999999적인 인생에서 유턴이란 죽음으로 직결되는 선상 위를 미끄러져가기 때문이다. 우위체계 속의 9는 8을 하위에 두고 있고 8이하의 숫자들은 삭제, 생략 혹은 9의 밑에 깔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수오 작가는 순도의 고조를 해치는 8을 소환하여 그것의 생략된 흔적을 가시화시킴으로써 우리가 망각하기 쉬운 이치를 언급한다. 더불어 소환의 방식은 거리를 둔 차가운 방식이라기보다는 다친 동물을 보살피는 듯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은 실이라는 재료로 8의 비어있는 흔적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8이라는 숫자가 중국에서는 엄청난 행운의 숫자로 인식되는 사실을 얘기할 수도 있겠으나 전수오 작가는 다양한 이미지와 설치물 각각의 맥락 안에서 하등 혹은 열등함으로 치환되어 소외되는 대상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는 부분이 중요할 것이다. 다른 작품 [묵포도] 에서도 [99.99] 에서와 비슷한 의미로 포도송이에서 떨어져 나와 아슬한 운명의 실에 연결된 하나의 포도 알에 시선은 집중된다.
기억에 관하여/ 설탕 /가변크기 /2012
작가는 현재의 자신을 획득하기까지의 불안하고 고되었던 20대를 회고하면서 전시를 기획하였다. 실제 그녀의 20대의 삶에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내밀한 상처에게 쉽사리 자신을 내어주지 아니하고 그러한 내상을 재능삼아 생각과 언어 속에서 이미지를 조각하기 시작한다. 비밀스런 연금술사처럼 상처의 돌은 몇 달이고 몇 해고 그녀 내면의 어딘가에서 여러 작용을 거쳐서 예술적인 광물로 변태한다. 이러한 작업의 방식(소재의 발효)은 이미지의 효과와 실습이 중심인 시각예술계에서는 조금은 낯선 방식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또한 모든 예술적 장치와 의미들이 엉킨 작금의 동시대예술현장에서 가능성과 불가능성, 예술의 비효율을 운운하기에는 시기적절하지 않은 지점이 있겠으나 전수오 작가가 차용하는 문인화의 방식은 확실히 익숙치않음이 있다. 이러한 낯설음은 아무래도 지금은 사라진 신분과 직업에 기인한 문인화의 특징일 터이고 전문화와 세분화의 세계에서도 문인화는 영역을 두기에 모호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가가 문인화에서 채택한 방법론은 정신체계를 수묵과 담채를 사용하여 시적언어처럼 간결하게 표현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사색과 예술적 수양은 예술가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이 시대를 관통하는 속도 안에서 차분히 앉아 사고를 정제하고 그 안에 숨은 날카로운 핵심을 길어 올린다는 게 그리 녹록치만은 않기에 이러한 작업방식은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오늘도 무사히 / 3m 낚싯대,전선,전구 /가변설치 /2012
문인화의 간결한 표현방식은 설치로도 연결되어진다. 전수오 작가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는 [바늘을 삼킨 풍선]을 보면 은유적이지만 직관적으로 와 닿기 때문에 많은 설명은 필요치 않다. 이 작업은 익숙한 두 가지 재료의 절묘한 위치와 관계로 존재의 부조리와 불안을 드러낸다. 아마 작가는 뿌옇고 부드러운 신체 안에 뾰족한 바늘을 숨기고 있을 터이고 그 바늘은 자신을 위협하는 무기이지만 동시에 텅 빈 곳 그리고 상처 난 곳을 꿸 수 있는 예술적 도구로써 사용자의 의지가 기능을 결정하리라. 마지막으로 작가는 '서정은 죽었다'라는 글귀가 부유하는 [살아있는 무덤] 설치작품에서 절망적인 귀결을 얘기하지만 자신을 통해 서정성의 부활을 꾀하며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인식하게끔 하는 것은 치유와 회생이라는 가능성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 김 매
바늘을 삼킨 풍선 /풍선, 바늘 ,실 / 가변설치 /2014
일본의 극작가 테라야마 슈지는 ‘인간의 상상력보다 높이 날 수 있는 새는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상상력을 흠모한다. 나의 작업들은 물질적, 정신적으로로 폐허가 된 세상을 초극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새라고 비유해도 좋을 것 같다. 절박함은 극적인 환상을 낳기도 하는데 다행히 아직 미치진 않았다. 미치지 않고 일단, 적절한 비행의 각도를 잡은 것 같다. 내가 제시하는 물리적인 요소들을 최소화 한 결과물은 상상의 세계로 가는 문이다.
이 전시는 나의 20대 중반 이후 시절을 돌아보기 위한 회고전이다. 그 시간에 죽어버린 젊음과 살아남은 작품을 돌이켜보는 방식. 나의 과거이지만 다른 한편에서 미래를 암시하는 시작점이다. ‘널 위한 무대는 없어 이번 생엔’ 이라는 정끝별 시인의 시 한 구절처럼 나에게는 무대가 없고, 열고 나갈 문이 없다. 고립된 나와 너의젊음의 한 때 안부를 물으며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오늘의 창조는 더 이상 희망찬 모습이 아니다. 아름다운 동산 위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것이 폐허가 된 건조한 어둠속에서 쓸쓸하게 기둥하나를 세우는 것. 이것이 지금의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노트 중-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