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 시절에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위로와 안정을 주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 대체로 부모가 그 역할을 하지만, 항상 같이 있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섯 살무렵, 나에게는 인견으로 된 루비색 머플러가 그런 존재였다. 어머니와 할머니 간의 고부갈등이 극에 달해 밥솥이 날아다니던 전쟁같은 유년기는 앞으로 겪게 될 사회대전(大戰)의 예고편 같은 것이었다. 그 때 손에 꼭 쥐고 냄새를 맡고, 얼굴을 부비면 묘한 안정을 가져다 주던 것이 나에겐 그 인견 머플러였다.
평범하지 않은 생의 굴곡을 겪어온 웁쓰양 작가에게는 루비색 머플러 대신 그림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삶이 주는 격랑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닻의 역할을 해준 것도, 자존감의 불꽃에 에너지를 공급해 움츠린 가슴을 펼 수 있게 해준 것도 그림이었다. 나아가 작가에게 그림이란 그것만 손에 쥐면 세상과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찬란하게 빛나는 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검의 자루를 꽉 움켜쥐고 예술이라는 세상에 발을 디뎠다. 손으로 전해져 오는 날붙이의 에너지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바로 예술이라고 믿었기에. 하지만 어느 날, 내내 잡고 있던 검의 날에 표정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왔다. 그 때 그는 낯섦과 불편함을 느꼈던 것 같다. 필요할 때 말없이 휘둘려 주던 존재, 바라보는 시선에 필요로 하는 모든 표정으로 해석될 수 있는 무표정으로 화답해 주던 존재. 그런데 그 존재가 그 동안 자신만의 표정을 가지고 나를 바라봐 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혼란스러워졌고, 살짝 무서워졌던 것 같다.
요란한 순간_acrylic on panel_75x51cm_2021
이미 예술의 숲에 발을 깊이 들인 터였다. 길가에는 외로움이라는 자객에게 당해 먼지를 뒤집어 쓴 미이라가 되어 버린 인간들이 즐비했다. 이대로는 걸음을 떼어놓기 힘들다고 느꼈을 그는 길동무가 되어줄 만 한 다른 무기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는 원체 눈썰미가 좋고 탐구력이 왕성한 사람이기에,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멋진 것들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들에는 설치, 퍼포먼스, 출판 같은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멍때리기 대회’라는 이름이 붙은 신형 기관총은 너무나 가볍고, 화력이 좋으면서도 힙했다! 그 기관총이 뿌려대는 적당한 관통력을 가진 상상력과 유희의 총알에 맞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포로가 되었다. 심지어 이 총알들은 발사된 뒤 저 스스로 바람을 타고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웁쓰양 작가라는 멋진 예술가가 한국에 있다고 소문을 내주는 역할을 해 주기까지 했다. 이 당시 작가는, 이대로라면 그림이라는 녀석 따위, 다시 손에 잡을 일 없이 예술의 세상 속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칼 주제에 가늠할 수 없는 깊은 표정을 가진 녀석이라니, 쳇. 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2020년, 그렇게 뛰놀 수 있었던 세상은 코로나와 함께 멸망했다.
한동안 그는 칩거를 거듭했다.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경제생활에 참여해야 할 때를 빼놓고는 커다란 테라스가 있는 4층의 옥탑에서 라푼젤 같은 생활을 이어 갔다. 하루 내내 집 안에만 있는 것을 못 견뎌야 했던 그를 아는 나로서는,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 사이에 멍때리기 대회를 조그맣게라도, 아니 비대면으로라도, 아니 그 이름만 걸어놓은 뭔가 다른 형태로라도 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처럼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했고, 웁쓰양 작가의 얼굴은 그에 따라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알고 보니, ‘멍때리기 대회’는 배터리가 들어가야 불이 들어오고 작동이 가능해지는 총기류였던 것이다. 그 배터리는 바로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모여들 수 없는 시대. 그런 시대의 ‘멍때리기 대회’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휩쓸고 지나간 뒤의 놀이공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움직여야 할 것들이 움직이지 않아 더욱 을씨년스럽고 쓸쓸한 풍경. 그 안에서 자라난 잡초들이 웁쓰양 작가의 마음을 덮어버린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될 무렵,
내일의 날씨_acrylic on panel_45.5x53cm_2021
웁쓰양 작가는 이사를 했다. 하루 종일 창가를 바라봐도 구름 떠가는 것만 보이던 그 전의 옥탑과는 다른, 배달 오토바이와 담배 피는 고등학생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지나칠 만큼 가깝게 보이는 빌라 2층이었다. 그 한 켠에 종이를 깔고, 비닐을 덧대고, 낡은 이젤을 꺼내 판넬을 걸었다. 그 판넬이 꼭 숫돌처럼 보였던 것은, 작가가 애당초 이 세계에 발을 들일 용기를 줬던 존재, 그림이라는 칼의 날을 제대로 들여다 보는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날 속의 표정을 들여다 보기 위해선, 먼저 만족스러울 때까지 벼려야 할 것이고, 그게 가능해야 다시 그 자루를 손에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시작은 쉽지 않았던 듯 하다. 그림을 쉰 9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 놓은 빈 캔버스의 강을 건너야 했고, 점점 또렷해 지는 푸른 날 속 눈동자를 앞에 놓고 격렬한 불편함과, 때로는 공포와 싸워야 했다. 작업에 매달리는 며칠을 보낸 후, 빚독촉하는 깡패처럼 찾아온 공황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고 며칠을 보내 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몇 달에 걸친 그 과정 속에서 차츰, 작가는 자기를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 쳐다보고, 그 시선을 피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다. 경직되고 곤두서 있던 그림 속의 선들은 차츰 부드러운 면으로 변해갔고, 각이 진 색깔의 레이어들은 뭉글뭉글하게 뭉쳐져 하나의 기운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작가는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팔랑거리는 한 자루의 신칼이 되어 공간에 색을 흩뿌리며 춤추고 있었다. 그림이 던지는 시선을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안의 시선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의 재미를 그림에 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재미로 세상을 보기로 결심한 게로구나. 라는 것이 예술적 한계가 명확한 나라는 사람의 웁쓰양 작가에 대한 비예술적 해석이다.
전시에 걸린 페인팅과 드로잉은, 어떤 ‘장면’이라기 보다는 작가가 스스로 굿판의 신칼이 되어 재미지게 휘둘린 ‘춤의 궤적’으로 보시는 것이 어떨까. 라는 것이 작가의 작업과정을 죽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드릴 수 있는 조언이다. 그 춤은, 아무리 일상의 회색 불꽃으로 지져도 다 타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투명하게 광휘를 발하는 무엇인가를 찾아낸 이가 추는 기쁨의 춤이기도 하고,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 속 검은 액체를 더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히기 위해 추는 진혼의 춤이기도 하다. 그림 속 몸짓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분이라면, 그 작품을 한자루의 장도(粧刀) 삼아 풍랑치는 일상 속으로 나아가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탁재형_다큐멘터리PD / 작가
밤세수_acrylic on panel_51x75cm_2021
낮은 목소리로 보여주는 그의 세상
질문 하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누군가에게 치유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질문 둘. 그림을 봄으로써 또 다른 누군가는 마음의 평안에 다다를 수 있을까?
시퍼렇게 벼려진 칼날 같은 개념을 앞세워, 간혹 신경질적인 행위마저 이른바 ‘미술’의 영역으로 편입하고야 마는 오늘날, 어쩌면 시각예술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도저한 과잉 사고로 오히려 복잡하고 불편한 심정에 빠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므로. 그리고 현대미술이라는 녀석은 괴물처럼 어기적거리며 다가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온통 평지풍파로 가득 채워놓다가 마침내 번번이 백기를 들어버리게끔 만들곤 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므로, 이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숨쉬기_acrylic on panel_45.5x53cm_2021
마지막 개인전 이후 9년 만에 마주하게 되는 웁쓰양의 ‘그림’들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첫 번째의 질문에 ‘다시’ 그림으로 돌아간 그녀가 경험한 일련의 과정들이 과연 한 작가로서의 여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봄으로써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때로는 현재의 모습과 좌표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 시간을 고개 돌려 보는 일은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시작은 2013년도였다.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작은 세속적 성공을 맛본 후부터 끝도 없는 슬럼프가 시작되었다. 붓을 든 손은 마지막으로 결승선을 앞둔 마라톤 선수처럼 무겁고 더뎌져만 갔다. 그림으로 세상에 던지고자 한 메시지는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 특유의 강박은 심해졌다. 세상에 대한 발언이 주는 중압감과 누구도 아닌 자신이 만든 헛헛한 빈 틈 사이의 괴리는 넓고도 날카로워 마침내 그림으로부터 줄달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미로처럼 엉킨 빈 캔버스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살기 위해 시도한 ‘생각 떨치기’는 역설적으로 ‘멍 때리기 대회’라는 이름으로 ‘웁쓰양’을 세상에 알렸다. 부담은 없었다. 그에게 그러한 퍼포먼스는 놀이였기에.
2019년 이후 다시 숨 막히는, 혼자만의 긴장이 찾아왔다. 놀이로 시작한 일련의 기획들이 더 이상 놀이로 끝나지 않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까. 공황상태였다. 이번에는 살기 위해 그림을 ‘발견’했다. 감염증으로 하늘길이 막혔고,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므로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밀폐된 공간에서 그는 약을 삼키며 벽지에 새겨진 꽃무늬 위에 검은색을 칠하고 또 칠했다. 신기하게도 숨이 틔었고 눈은 맑아졌다. 홀로 행위하여 남긴 흔적이었기에 홀로 즐거웠다. 그림이 강박이 아닌 ‘재미’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림이 더는 이 사회를 바꿀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혼자 그 짐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탄식이 입 안에서 말이 되어 흘러나왔다. “그림이 그림이지, 뭐.”
성불_acrylic on panel_51x75cm_2021
그의 네 번째 개인전 타이틀은 《그림 좋다》. 바꾸어 생각하면 《좋은 그림》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 글을 쓰는 나에게 일종의 안도감마저 준다. 먼 길을 돌아 그림이 가진 ‘맛’에 눈 뜬, ‘멍 때리며’ 온전히 자신만을 향하는 시선을 갖게 된 그가 반갑다. 모두가 회화의 복권이니, 회화의 귀환이니 말하지만, 애초에 그림으로부터 떠나지 않은 그에게 그러한 언사를 덧씌울 일은 아니다. ‘좋은 그림’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난 그에게 이번 전시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일 터이다. 웁쓰양은 예술이라는 언어로 자기 안의 열등감, 우울, 희망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이제 우리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차례다. 그러니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쯤에서 슬며시 밀쳐두어도 될 듯하다.
약먹기_acrylic on panel_51x75cm_2021
아름다운 것만을 보고 그리는 것만이 이 늑대 같은 삶에 치유를 제공할 수는 없다. 칠흑 같이 어두운 깊은 곳에서 퍼 올린 자기 성찰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동질감과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흥미롭게도 이러할 때 현대미술은 동시대성을 확보하게 된다. 작가의 이야기가 확장되어 오늘, 우리의 보편성을 드러낼 때 공감은 부록처럼 끌려온다. 그가 체현하여 종내에는 재현해내는 우리 삶의 모습들은 초점을 잃은 채 심드렁한 이미지로 표현된다. 심지어 가치중립적으로도 보인다. 당연하게도 그의 이미지들은 회화의 언어를 통해 구현되므로 비언어적이다. 언어로 재현 불가능한 이미지와 그가 바라본 삶의 순간들이 만남으로써 비로소 그의 회화는 하나의 독특한 속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미지-언어처럼 불가능한 것들과의 만남은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재현 불가능한 순간들처럼 불가해한 삶의 비밀들과 연계된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재현된 이미지가 대상이라는 원본의 지표(index)를 넘어서는 그 순간(punctum)을 우리 앞에 제시함으로써 확장된 감각은 사유의 순간을 거쳐 마침내 공감의 장에 나아가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친밀하지만 낯선 실재와의 만남을 우리는 매 순간 경험하고 있으며, 단순화 혹은 판타지를 통해 불가해한 빈 공간을 길들이며 적응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귀환하는 실재의 흔적’이야말로 그의 회화가 우리에게 닿을 수 있는 몇 가지의 길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좋은 그림’을 향한 투지 어린 고군분투와 맹렬한 갈구 속에서 길을 잃었던 그가 뜻밖의 시련에 의지하여 다시 좌표를 설정했듯이 우리의 삶 또한 다르지 않을 터이다. 기이한 사건이나 특별한 사물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여유가 확보되었기에 그의 그림은 이제 좋다. 나의 삶과 타인의 그것이 다르지 않음을 웁쓰양의 그림은 이제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무엇이 들리는가. 무엇이 보이는가.
박석태_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