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작가는 디렉터의 제안에 플레이스막의 세 공간을 다 쓰는 개인전을 열기로 했다. 디렉터는 박철호의 개인전이라면 공간 세 곳을 모두 쓰는 일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여겼고, 현실적으로 스케줄 조정이 가능했다. “공간 세 곳 다 쓰는 거 어때?”라는 물음을 들었을 때 나 또한 “재미있겠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박철호는 오랜 시간 구상하고 곱씹다 에너지를 단박에 쏟아내는 편인데 그가 수집한 방대한 양의 물질과 에너제틱한 작업방식이 분리된 공간을 충분히 연결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전시 ‘교란종’에는 기둥이 되는 이야기 「교란종」이 있다. 2020년 인디아트홀공에서 열린 ‘당매’, 2021년 스페이스나인에서 열린 ‘적대자’ 이번 전시인 ‘교란종’—그 간에 쓴 단막극 ‘녹수정’, ‘로드킬 수집가’, ‘색맹자들’, ‘오리너구리 다이빙단’—까지 작가는 10만자가 훌쩍 넘는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작가의 일 때문인지 선천적인 특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집대성한 사물의 규모나 각각의 물성이 뿜어내는 기운을 해석하고 다루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다. 작가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들로 찰떡같은 궁합을 만들기도 하고 본래의 쓰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시키기도 했다. 그의 뇌리에 박힌 단단한 이야기 기둥 사이로 전시의 장면들이 스윽스윽 지나다녔나보다. 작가는 만날 수밖에 없었던 물건들을 마주하면서 즐거워했고, 그런 작가의 모습은 전시를 함께 준비하는 사람들까지 즐겁게 했다.
필연의 고물들
“이건 이야기에서 온 거라 고물에는 없었어. 그런데 글을 쓰고 나면 신기하게 나타나. 머리 같은 것 말이야. 우연히 만나게 됐을 때, 쾌감이 있지!” 일례로 작가는 플레이스막3의 공간을 종교적인 장소로 상정해 두고 구상했다. 머릿속에 떠올린 공간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꾸밀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망한 점집’과 ‘불에 탄 교회’를 철거하는 일을 맡았다. 주운 물건들로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은 재미가 없었다. 작가는 철거하게 된 공간에 응축돼있는 사람들의 기운과 흔적을 만지고 바닥에서 들어 올리면서 자신이 떠올렸던 이야기에 접붙이기도 하고, 표지판 삼아 방향을 틀기도 했다. 온종일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마음이 급했다. 일하면서 받은 영감을, 떠오르는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글에 녹여내려면 피곤한 몸을 이겨내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자신도 모르게 작품에 쓸 물건들이 눈에 띄었던 건지, 눈앞에 나타난 사물을 보고 이야기의 다음을 떠올렸던 건지는 알 수 없다. ‘당매(2020)’나 ‘적대자(2021)’까지만 해도 이야기에 맞는 물건들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다는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는 마치 정해져 있는 듯 ‘그것’을 발견하게 됐다고 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지각색의 물건들과 어마어마한 양의 폐기물 중에 필연적 인연들은 얼마나 귀했을는지. 그의 작업실에는 작가와 연줄이 닿은 길 위의 물건이 가득했다. 다시는 전성기를 맞지 못할 것만 같은 서커스단의 창고가 있었다면 그 모습과 비슷했을까? 고물 입장에서 보면 방금 들어온 신참이 중앙무대에 서기도 하고, 10년 동안 묶은 고참이 여전히 무대 뒤에 있기도 하다. 작가에게 호명되면 고물들은 얼굴에 쌓인 먼지를 닦고 이야기에 합류했다. 작가 식대로 자리를 잡은 고물들은 남의 역할을 시기할 법도 한데, 아무 말이 없다.
이야기 「교란종」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 「교란종」은 지난 개인전의 끝에서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영감을 나누었던 사람들—그의 작품을 사랑하고 항상 도움을 주는 인물들이 있는데 벌꿀오소리고물예술단을 포함한 주변 미술인들—의 감상을 채집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작가는 주변 인물들의 말이나 그들에게서 받는 영감을 이야기에 끌어다 썼다. 지난 개인전 소개 글 말미에는
“별도 못 보는 사람들이 주워들은 걸로 굿을 하다가는 작두에 발만 잘린다. 동서를 가로질러 모든 곳에서 나타나며 샤먼적 궁금증을 증폭하는, 뱀 이야기는 물론 따로 들여볼 만하다. 단, 예민한 인간으로서. 미술도상학으로는 ‘여기도 뱀이 있다!’ 외엔 밝힐 것이 없어 매력이 없다.”라고 쓰고 있다. 박철호의 작업이 값도 지불하지 않은 샤머니즘 흉내 내기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 글쓴이의 의도도 있겠지만 글쓴이의 말대로 사실 뱀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않았기도 했다. 한데 작가는 이러한 감상이 재미있었나 보다. 이번 전시에서는 오히려 뱀이라는 기호 자체를 이야기 전면에 배치해 버렸다. 작가 본인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각종 신화나 구전설화에 등장하는 뱀의 도상이 갖는 심오한 의미가 인간 존재에 대한 구차한 갑론을박을 각설하는 형상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게다.
머리 뜯긴 유혈목이
뱀. 뱀. 무슨 뱀? 작가는 폐스티로폼을 감용 하는 현장에서 뱀을 떠올렸다. 신선한 상태로 무언가를 배송하기 위해서 마구잡이로 찍어낸 스티로폼이 쓰임을 다하고 나면 환경에 극도로 유해한 폐기물이 된다. 이를 처리하려면 상당히 큰 비용과 인력이 들어가는데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몸소 감당하고 있다. 스티로폼을 처리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고안해낸 방법은 열을 가해 압출하는 방식이다. 뱀은 인간에게 유해한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실존하는 인간을 반증하기도 한다. 뱀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생각해 보자. 닭살이 돋지? 그 까닭이 바로 DNA 때문이라니 말이다. 압출되는 스티로폼을 보고 작가는 소름 끼쳤는지 모른다. 감용기에서 이리 튀고 저리 튀며 사정없이 분쇄되는 폐스티로폼이 뜨거운 기계 속을 지나 압출되면, 작가는 두툼한 내열 장갑을 끼고 똬리를 틀었다. 금세 굳어버리는 감용 스티로폼은 인간의 뼈처럼 단단하기도 하고 반짝이는 유리처럼 영롱하기도 하며 석탄 찌꺼기처럼 새까맣기도 하다. 나는 작가와 줄곧 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느 날 같이 논두렁을 걸을 일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또 뱀이 나타났다. 죽어있었는데 처참하게 머리가 뜯긴 모습이었다. ‘밤에 당했네.’ 머리가 뜯긴 유혈목이의 무늬는 길에 난 잡풀과 섞여 사람들의 눈에 띄지 못하고 납작하게 밟혀 문드러졌다. “뭐에 그랬지?” 작가는 어김없이 납작하게 짓눌린 뱀의 사체를 주워들었다. “세상에 길바닥에 얼마나 많은 죽음이 널려있는지 알아? 나는 그 길거리의 주검들을 걷어서 파는 업을 하네. 모두들 꺼리는 일이지만 아스팔트에 눌러 붙어 나만 오길 기다리는 그 녀석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피와 엉킨 털 뭉치, 어디서부터 터져나갔는지 모르는 가죽과 살점, 웅크림을 쏟아낸 내장, 이 모든 것들이 신선한 썩은 냄새를 풍기며 나를 잡아 끈다네.” 박철호, 2021, ‘로드 킬 수집가’ 중
“우리는 다 고물”
작품 교란종(2022)에 출연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아, 그러니까 결국 우리도 다 고물이야!” 한 배우가 한 말에 모두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 한마디에는 작가에게 캐스팅되고 디렉션받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박철호는 배우들의 평상시 모습을 관찰하고 그들이 가진 저마다의 정체성과 특징 또한 고물처럼 주워 담았다. 박철호의 작업에 쓰이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작가는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을 만나게 되었는지 곱씹으며 구렁이 담 넘듯 이야기 속에 배치한다. 선택의 영역에서 벗어나 고독해진 것들에게 존재를 만끽하게 하는 전령사로서 역할. 애써서 만든 누군가의 수고로움과 또 다른 누군가를 살렸을 사물들이 제 역할을 잃고 풀이 죽었을 때 슬며시 끌어안는. 죽음과 생을 관통하는 만물이 먼지에 뒤덮여 업신여겨지는 데에서 연민을 느낀 건지. 그들로부터 영감을 얻고, 이야기 속에 자리하게 하고, 쓸모를 주면서 작가는 삶이 주는 무게를 덜어낸 건지도 모를 일이다. 죽은 화가의 작업실을 철거하면서 남겨진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버려진 도록의 도판을 참고하면서 재료들의 물성을 체득하는 작가의 과정은 쓸모를 부정당한 사물들이 들려주는 사람 사는 이야기, 살아남는 이야기, 살게 되는 이야기이다. 즉 생이라는 불완전한 형태로 태어나 자기만의 신념을 품고 살아가는 미지로 가득한 인간들의 실존에 관한. “어디에선가 나 또한 교란종이었을 테니까.”
교란 과잉의 결말은 어떤 모습일까? 93년을 산 촘스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늦어버린 것일까?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점쳐볼 수 있을까?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웃기다. 짜증이 나기도 하고 상식에서 벗어난 일들도 많다. 상식이라는 게 뭘까? 믿는다는 것은 무얼까? 맞는 게 뭘까? 존재하는 걸까? 박철호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낸다. 박철호의 이야기가 작가의 재능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서 채집한 것들의 조합이라는 데에서 아이러니한 슬픔과 괴로움이 꿈틀댄다. 인간이 믿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을 다시 산산조각 내는 인간들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어지럽히고 건드리면서 역사를 만들어간다. 전시 ‘교란종’은 종교적 상징으로 가득하지만 사실 신성모독이나 종교비판과는 거리가 멀다. 살아가면서 맞닥뜨린 순간의 선택과 태도가 만들어내는 교란의 징후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큰 의미가 부여되고 만들어졌다가 아무 힘도 없이 흐트러지는 고물과도 같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욕망, 해야 한다는 의식과 관념들로 채워지는, 당연히 살아내야 하는 삶의 순간을 채집한 결과일 뿐이다. 박철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끔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내 허례허식이 지나친 까닭도 있겠지만 세상이 죽인 사물을 살려내면서 그가 얻은 통찰이 꽤 깊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첫째 박철호는 기본적으로 반골 기질을 가지고 있다. 작업에 관해서 이야기 하다 보면 “이거 그거 아니야?”, “그건 많이 보여주는 방식이잖아?” 까칠하게 되묻는다. 둘째 박철호의 작업은 작가가 가진 성향 그대로 어떤 카테고리에도 만족스럽게 속하지 않는 애매모호한 지점에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현대미술의 범주 안에서 또한 작동된다. 누구는 그를 감독이나 연출가로 보기도 하고, 누구는 다원예술을 다루는 동시대 미술가로 정의하기도 한다. 셋째 그의 이야기는 얼키설키 짜낸 장광설이다. 영감을 받는 대로 마구 확장하는, 마구 쌓이는, 마구 압축되는 이성적 헛소리다. 글을 구조적으로 조직하는 것보다도 소통에 대한 의지를 앞세운다. 그런 지점에서 그는 미술 안에 존재한다. 글 안에서 오작동하는 글쓰기 규범은 읽기를 방해하기도 전에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혹시 당신은 규범에 걸려 넘어졌는가?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로부터 해방된 작가의 이야기는 작문의 세계를 교란하는 또 하나의 교란종이다. 나름의 질서가 있지만 질서를 망가뜨리는 존재에 대한 장광설은 한없이 평범한 인간사의 무게감 있는 장면들을 집적한다. 저울로 달아서 팔면 큰 벌이가 될 만큼. 뱀에 대한 공포로부터 시작돼 인연으로 만들어져 그의 재기발랄함으로 엮어진 이야기는 오서독스 하다. 박철호에게 요령은 없다. 아침부터 밤까지 제 할 일을 하는 스트레이트 펀치만 있을 뿐. 제기랄, 다 읽었네. 이런 장광설을 봤나! 그래서 말이야, 전시 속 토끼가 숨긴 부활절 달걀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