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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이미지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는 시대.

문화에 무자비하게 피폭된 나는 앞서의 영향으로 무엇이 옳고 그릇된 판단인지 가끔씩 의심스럽다. 우린 사회적 동물이기에 관계맺고 의사소통을 하며 자아를 형성해 간다.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받는다는 것 역시 애초 의미없는 운명론에 근거하는지도 모르지만 취향이나 정체성, 가치관의 온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유동적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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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와 물감의 관계(Intercourse of Canvas and Paint) / 가변크기 / 단채널영상 / 2015

 

그렇기에 순간의 나, 감정에 동요되는 난 역시 온전히 믿을만한 구석이 못될 확률이 크다.

그 결과 회화를 전공한 본인은 내용의 측면보단 그림자체의 도상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림이라는 것은 면과 매체가 만났을때 창작자의 배열에 따라 작업으로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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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와 물감의 관계{Intercourse of surface and medium(oil color)}/ 72.7 x 90.9 (cm) / 캔버스에 유채(Oil color on Canvas), 피임용 콘돔 오브제(contraceptive Objet)/2020

 

 

 

주체가 (비)물질을 배열함으로서 이들을 작업으로 탄생시키고 결과 우리는 작품이라고 그것을 부르게 되는데 이를 다른 관점에서 전치시켜본다면 주체가 면과 매체를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면과 매체가 주체를 이용해 작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주체는 객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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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을 위한 가변설치 / 가변설치 / 혼합 매체 설치 (Mixed Media Installation) / 2019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려낸 것, 그려진 것이 회화라면 주체가 전도된 이미지는 어떻게 생겼을까? 물과 물들이 이끄는 차원은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시각수단과 기의의 가설을 세워 볼 뿐이지만 세상은 보이는 차원만이 세상을 만드는 구조가 아닌 것이라는걸 가끔씩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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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와 물감의 관계{Intercourse of surface and medium{acrylic color)} / 164 x 464 (cm) / 면천에 아크릴{Acrylic color on linen(surface)}, 피임용 콘돔 오브제(contraceptive Objet) / 2019

 

 

이 작업이 존재한다는 건 이또한 물질들이 나를 매개삼아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려고 하는 어떠한 몸짓이나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만남은 어쩌면 우리를 피동의 매개수단으로서 이용하고 미술을 잉태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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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의 주체를 위한 오브제 설치 / 가변설치 / 기성품에 캐스팅 설치 (Casting installation on Ready-made) / 2019

 

 

 

나는 '캔버스와 물감의 관계(Intercourse of Canvas(surface) and Paint(medium)'라는 가설을 세우고 이미 미술이라는 학문이 동시대 미술에서 비물질적 요소가 미술의 재료로서 사용된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가시적인 물(체)이 존재해야지만 나의 조형언어를 독해하는 데에 유희적인 부분과 미적쾌감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 아직까지도 관념 속 통용되고 있는 모더니즘 회화의 프레임 양식(도상)을 가져왔다. 미술을 전공으로 배워왔던 사람은 포스트모던 그 이후의 것을 고민하고 미술이 비 전공인 사람들은 내가 바라본 세상에서 모더니즘, 혹은 이전의 사고를 가질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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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와 물감의 관계{Intercourse of surface and medium(acrylic color)}/ 45.5 x 53 (cm) / 캔버스에 아크릴{Acrylic color on Canvas(surface)}, 피임용 콘돔 오브제(contraceptive Objet) / 2019

 

 

 

무엇이 엘리트적인 사고인가는 더이상 중요치 않다. 문화는 새로운 것을 늘 갈망하고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토론하며 발전한다. 고급과 저급을 나누는 이분법적 프레임은 해체된 지 오래되었고 이런 언어를 쓴다는 것이 이미 나의 세대가 종종 차용하여 쓰는 언어가 아니기에 낡은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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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와 물감의 관계{Intercourse of surface and medium(water color)} / 190.9 x 53 (cm) / 캔버스에 수채{Water color on Canvas(surface)} / 2020

캔버스와 물감의 관계{Intercourse of surface and medium(water color)} / 190.9 x 53 (cm) / 캔버스에 수채{Water color on Canvas(surface)} / 2020

 

 

나의 역할은 내가 고민해왔던 것들을 읊는 것이고 작업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읊는 것조차 물질이 나를 조종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쓰는 글은 키보드를 내가 누른것일까? 키보드가 나의 손가락을 끌어당긴것일까?

 

*신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