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가 생기하는 지점에서
도표와 도면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우리는 종종 ‘도(圖)’의 의미, 바로 ‘그림’ 혹은 ‘이미지’를 가리키는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수치화된 값을 알기 쉽게 보여주고 구조물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자료는 각각 도표와 도면을 통해 시각화된다. 이때 그림 혹은 이미지는 실재하는 대상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복사하는 것과 달리, 다른 차원으로 번역하여 보여준다. 도표의 경우 사회적 현상이나 범주를 시각화하여 분석 및 기록한다. 한편 도면의 경우 실현할 입체적 결과물을 미루어보고 제작에 도움을 주는 자료가 된다. 두 가지는 각각 현실을 풀어 보여주지만, 수치화하고 풀어낸다는 점에서 사진과 다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도표와 도면이 가리키는 ‘도’의 의미를 곧 사진의 경우와 동일하게 보기 어렵다. 전자와 후자는 모두 이미지를 기록하지만, 각기 시각화하는 ‘의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의도(意圖)’라는 한자어를 보면 도표와 도면에 공통적으로 들어갈 ‘도’라는 한자를 찾아볼 수 있다. 같은 한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의도’에서 한자가 가리키는 의미는 그림이나 이미지와 좀 다르다. 바로 책략이나 계획이라는 의미로 ‘도(圖)’는 쓰이는데, 여기서 의미 구분을 통해서 도면 혹은 도표와 사진의 차이, 나아가 그 단어가 각각 가리키는 바를 혼돈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말하자면 도표와 도면이 계획성과 책략의 결과로 현실을 가시화하는 한편, 설령 의도가 들어간다고 해도 사진은 무의식적으로 기록되는 여지가 거기에 존재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진이란 일반적인 사진에 해당한다. 최근에 종종 ‘이미지’로 풀이되는 결과물은 편집과 후가공의 단계, 그리고 일부터 상을 구축하는 단계에서 어떤 의도가 들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반인 사진의 경우, 거기에 의도치 않은 대상이 들어가거나 표정이 포착되는 점에서 의도가 모두 수습할 수 없는 여지가 존재한다.
임의지도_단채널영상_3min_2020
이와 달리 도표와 도면은 의도, 책략, 그리고 계획성이 지배한다. 도표는 특정 데이터값을 취합하고, 다수의 결과를 추출하여 하나의 경향 혹은 추세로 흐름을 가시화하고, 도면은 앞으로 실현될 설계를 염두에 두고 동선, 공간 배치, 수용 규모를 각종 데이터에서 도출한 결과이다. 이런 차이를 통해서 우리는 도표 혹은 도면과 사진 양자가 어떻게 현실에 개입하는지 구분할 수 있다. 사진에서 현실은 촬영자의 시선과 의도에서 벗어난 대상까지 포착한다. 한편 도표와 도면에서 현실은 상의 복사본보다 데이터의 추출과 도출을 통해서 드러난다. 사진이 보는 사람이 한없이 개입하지 못하는/못하던 현실까지 기록한다면, 도표와 도면은 현실을 최대한 다룰 수 있게 인위적으로 자료를 정리하여 시각화한다. 현실에 대한 각기 다른 접근은 이미지 혹은 그림으로 옮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얼버무리기 힘들다. 이런 구별을 거쳐야만 우리는 송채림의 «이미지도»라는 말과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찰지도_거울, 아크릴봉, 판넬_30cmx30cmx32.8cm_2020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선보이는 <이미지 짓기>, <이미지 다이어그램>, 그리고 <임의지도>의 세 작품은 앞서 말한 도표와 도면, 심지어 사진이라는 결과물도 아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이미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작품은 궁극적으로 전시 제목과 어떻게 연결될까. 이미지와 도의 합성어인 ‘이미지도’가 같은 의미로 동어반복되는―“이미지는 곧 ‘도’이며, ‘도’는 곧 ‘이미지’이다”―단순한 표현 이상이라면, 그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작가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다양한 지지체 혹은 매체를 넘나들며 전시 공간에 펼쳐진다. 유리, 투명 아크릴, 그리고 스크린에 각각 등장하는데, 이때 이미지는 무엇을 ‘가리킬까’?. 현실을 데이터값으로 도출하여 활용 가능한 도표나 앞으로 구현될 스케치 업 같은 도면이 그렇듯이, 아니면 인화하고 나서 의도치 않은 것까지 기록된 사진이 그렇듯이 작품은 현실을 가리키거나 해석하여 보여주고 있을까. 작가가 궁극적으로 현실에 존재하고 현실 세계에서 작품과 전시가 선보여지는 의미에서 이 작품은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그렇지만 이는 모든 미술 작품이 당면할 수밖에 없는 기본 조건이다. 광대한 현실이라는 지평에 있으면서도, 그의 작품은 (도표와 도면이 그렇듯) 특정 대상을 추출 및 도출해서 보여주거나 (사진이 그렇듯) 무의식으로 기록된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미지 다이어그램_렉산, 홀로그램 필름, LED 라이트 박스_30cmx20cmx8cm_2020
오히려 전시를 통해서 작가는 이미지가 생기하는 지점을 먼저 설정한 다음, 이미지가 전개되는 방식을 전시공간에 보여준다. 이는 이미지에 기능을 탈락시키거나 제거하고, 나아가 처음부터 실용성을 거부하는 미적 추구와 다르다. 만약에 작가가 이런 태도로 작품을 제작했다면 ‘이미지도’라는 제목은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이미지를 다루어 계획성과 의도를 반영하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작가는 이미지의 다른 생애를 그려나가는 기점을 세운다. 도표와 도면에서 요구되는 데이터, 바로 현실에서 추출되고 도출된 결괏값을 이미지에 반영하는 것과 달리, 아니면 사진처럼 현실을 시각적으로 본떠 보여주는 것과 달리, 작가는 이미지를 출발점으로 삼아 현실에 개입한다. 이때 개입 방식은 현상이나 실재하는 대상에 뒷받침되는 ‘반영’과 다르다. 작가의 접근 방식은 이미지에 결합한 의도를 반영의 결과로 보거나 무의식적 기록의 단계로 두지 않으며, 이미지 자체의 생산을 의도 삼아 제작한다. 그러기에 작품에 드러난 투시도법적 관찰, 반사나 그림자는 대상에 동반되어 나온 결과, 바꿔 말하면 현실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뒷받침되는 것과 달리, 먼저 상으로 맺히는 지점이 된다. 여기서 작가는 이미지와 현실이 맺는 관계, 바로 그 지평 한 가운데에 제작자로 서게 된다. 그러면서도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그려 나가거나 복제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빈 화면에 일부터 이미지를 그려나가는 프로그래머와 결이 같다고 볼 수 있다. 작가 스스로 “이미지도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생산을 위한 것이고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들을 도면에 기록하여 다음에 대한 초석을 다진다”라고 말하듯이,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의도로 제작의 결과물 즉 이미지는 탄생한다.
콘노 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