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업의 시작을 돌아보면 기록으로서의 기능을 존중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혼자 몰두해서 쓰는 편지이지만 어떤 사건이나 일상 속에서 잊히기 쉬운 환경의 폭력적인 면에 대립하는 행위로 마음을 적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210 X 297mm (A4 복사용지) 크기의 흰 종이에 담긴 마음은 캔버스 100호 크기로 확대되었고 화면이 넓어져서 무엇을 그렸는지가 더 잘 보일 뿐 작거나 큰 종이와 캔버스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파 개_crayon, acrylic on canvas_112 X 145 CM_2020
무의식적인 위치선정으로 시작된 점으로부터 선과 면으로 확장된 이미지는 내가 담고자 했던 것을 뛰어넘어 다른 것을 드러내 보여주곤 한다. 좀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싶어서 선택한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존재감도 보여주었다. 화면의 크기가 전달하는 에너지가 있기에 앞으로는 그 부분에 대한 연구도 필요할 것 같지만 어떤 작업을 위해 재료를 준비하는 계획적인 태도 보다는 평소 마음이 이끄는 데로 수집했던 재료들을 화면에 필요에 따라서 적용하는 방식의 작업과정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번 개인전에서 펼쳐지는 대부분의 작업은 이사 후 새로운 공간에서 그려졌다. 마침 생애 처음으로 겪어보는 일처럼 낯선 바이러스로 인해 고립을 자처하던 시기에 나와 타인을 위한 기도의 마음 외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혼돈 속에서 그동안 필요에 따라 편리하게 습관적으로 행하고 의식 없이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을 다른 무게와 질감으로 바라보는 눈을 더 크게 뜨게 했다.
밀크하우스 acrylic on canvas_130 X 160 CM_2020
예를 들어 이번 전시에 걸린 [핑개]라는 작품을 보면 질감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작업자의 태도로서 구체적인 간절함을 드러내는 행위로 건강을 기원하며 손가락 터치 하나에 ‘아프지 마세요’ 라고 말하며 물감을 묻힌 손가락으로 캔버스에 조심스럽게 핑거드로잉 하는 행위로 마음의 평화와 에너지가 그림 속에 가만히 깃들기를 바랬다.
불면증을 위한 노래_acrylic on canvas_112 X 155 CM_2020
[매일 자라는 그림들]이라는 개인적인 기록물이 있는데 ( 매일 자라는 그림들 ; 스스로 기억력의 한계를 의식하고 찰나처럼 지나가는 순간을 종이에 그리고 써서 스크랩북에 오려 붙이고 단상을 무심히 배치한 기록물 )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스크랩북의 짧은 기록들을 넘겨 보면 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을 지나 이곳에 이르렀고 그 사건과 이야기들은 지금의 현실과 긴밀하게 연관되었음을 실감하며 작업을 구상하거나 화면을 마주할 때 우연을 가장해서 갑자기 떠오르거나 튀어나오는 이미지가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지나온 시간과의 연관이 있을지도 모를 이미지와 색을 화면에 드러내며 쫓는 것이 나에게 작업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추리해본다.
나의 작업도 오늘의 시간과 일상을 지내면서 빛과 물, 바람 등을 흡수한 식물이 자라듯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고 성장을 조율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다운 형태로 풍성해진다고 생각된다.
선 화
핑 개_acrylic on canvas_112 X 145.5 CM_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