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연展 / 元柱連 / Robeverte / painting / 2011.02.01. - 2011.02.16.
Il fait beau는 ‘날씨 좋다’ 라는 뜻의 불어다. 여기서 '날씨'와 '좋다'는 문학적인 의미가 없다. 그저 나그네가 낮은 문턱의 여인숙을 숙박하고 나오다가, 햇살을 느끼며 튀어나오는 말투 정도이다. 작가는 지금 과도기이다. 멍하니 딴청을 피우는 시기이다. 원주연 작가는 보기 드문, 예술 안에 삶이 들어가 있는 슬로우 라이프형 작가인 것 같다. 여러 내적 사유들을 그림으로 풀어낸다. 큰 사조의 무거움이 아닌, 작가의 작품에는 본연의 알레고리가 참으로 솔직히 담겨 있다. 왜 그림을 그리고, 이 그림은 무엇을 표현하는지 묻는 원론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도, 가장 이상적인 보기와 가능성 있는 답변을 해준다. 전혀 실리적이지 않은, 작가 본연의 내적 이야기 임에도, 뭉뚱그리며 난해를 유도하지 않는다. 구태의연한 도식화된 표현들에 지쳐하며, 그러한 명분에 집착하는 본인의 상태를 스스로가 직시한다. 그런 스스로를 바보라 생각하며, 머뭇대고 있는 상황을 놓치지 않고 있다.
원주연_묶여있는 의자_장지에 혼합재료_116.8×72.7cm_2011
작가의 작품에는 표현의 주제에 대한 뚜렷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인가 갈망하며 갈증을 느끼는 것이 명백하다. 작품들 중, 작가 스스로를 표현한 초상들 안에서도 작가와 작품에는 묘한 괴리감이 있다. 초상의 시선은 존재하지만 느껴지지 않는다. 동물의 팬시함도 외형적인 무의미로 가두어둔다. 작가의 무의미는 의미가 없음이 아닌 천륜의 사랑과 같은, 현존하는 피조물에 대한 거대한 역학관계를 이야기 한다. 무조건적인 무언가에 대한 열망... 그것은 무의미로, 죽음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다. 작가에게 동물은 기대고 싶은 대상이지만 상대적으로 상처 역시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반대적 감성들은 오히려 공허함을 던져준다. 작품들 내의 미적 공상들은 돌출되어 도드라지는 상상이 아닌 마법적 사실주의로 지극히 현실적이다. 처음 보는 장면들임에도 거슬리지 않는다. 꽉 찬 화면들, 여러 이야기들, 그러나 하나같이 공허하다. 가장 정직한 표현으로 작가의 상태를 보여준다.
작가는 이전 전시에 대해서는‘깨달음이 있었다’할 정도로 사고의 확장에 풍요로왔었다. 하지만 현재는‘그런 적도 있었을 뿐 이었다’라 이야기한다. 작가는 지금 자신이 전시를 해도 되는지, 정점이 없는, 과정 속 작품들이 전시가 가능한지 여러 번 묻지만 전시란 삶을 보여주는 것 뿐 만 아니라, 작품의 진정성도 동시에 갖춰야 될 덕목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과정의 진솔함은 더욱 작가적 삶의 역량을 투영시킨다. 관객은 작가에게 처음과 끝을 가늠토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며 사유하는 동반자로서 궁극의 위로와 설득을 원한다. 보여주기 위한 센세이션 이상(以上)의 가치를 이러한 과정속 변칙이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는 현재 심리적으로 온유하지 않다. 사회적 동물로서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조용히 노력하고 있다. 지금의 과정이 진정 유유자적인지, 전투적인 삶의 예술적 과정인지 그 결과가 감히 궁금하다. ■유디렉
... 어쩌면 유리창이 깨진 순간부터 모두가 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운이 좋다면 친구가 죽은 순간부터 였을지도 모르죠. (작가노트「여행」중) ■원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