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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자는 밤과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밤과 안개”, 알랭 레네가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만든 다큐명이자 히틀러가 시행했던 작전명이기도 하다. 나치 정권에 저항하는 자들은 누구나 밤과 안개 속으로 소멸될 수 있음을 암시했던 이 명칭은 알랭 레네에 의해 망각과 기억의 흐트러짐에 저항하는 다큐로 만들어졌다. 홀로코스트는 인류가 잊어서는 안 될, 되풀이 돼서는 안 될 가장 치욕적인 인간 역사이지만 찬란한 기술문명의 화려한 조명과 속도에 바래지고 밀려 현대인의 기억 속에서 퇴장한 듯하다. 이는 가까운 우리 역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예시다. 사실 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부끄러운 역사적 진실을 서둘러 봉인해버리거나 아예 무관심으로 묻어버린 예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나는 ‘밤과 안개’가 지닌 함의를 되새기듯 작업을 통해 수치의 인간 역사를 다시 소환해서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삼고 싶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 살육은 진행형이고, 그 배후라 할 수 있는 강대국들의 비윤리적인 자본의 뒷거래는 물론, 이를 알면서도 나약한 국가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기꺼이 침묵의 공조와 망각을 선택하고 있기에, 이제는 국가를 떠나 개인의 연대 가능성을, 예술노동자인 나는 작업을 통해 ‘기억’의 연대 가능성을 짚어 보고 싶기 때문이다. 


2.생각하지 않은 자, 밤과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캔버스에 아크릴, 콘테, 145.5×112.1cm, 2018_800.jpg

생각하지 않은 자, 밤과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_캔버스에 아크릴,콘테_145.5×112.1cm_2018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망각에 저항하여 기억하고 있겠는가? 여기서 기억이란 단순히 머릿속에 머무름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필요시에는 행동으로 이어져 불의에 저항할 수 있게 만드는 추동력을 말한다. 문제는 개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과거의 폭력에 대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으며, 현재 발생하고 있는 부조리한 전쟁에 대해서도 저항의 목소리를 보탤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점에 대해 나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현재 우리는 가상공간을 통해 새로운 인간서사를 창조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인식과 이미지를 숫자와 기호로 표시할 수 있는 디지털 혁명을 현대인은 경험했다.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인간은 속도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표류하며 신대륙을 발견하고자 떠도는 디지털유목인이 되었는가 하면, 자본주의 시스템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지배를 받고 있다. 자본의 아낌없는 투자가 만들어낸 화려한 미디어의 향연은 인간의 사고를 방해하고, 때론 상대적 박탈감,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미디어 폭력을 모방한 ‘묻지마’폭력을 낳기도 한다. 기술의 발전은 지구상의 인류를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이어주어, 그 어느 때보다 근접해 있음을 실감하게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의 진보가 속도를 높일수록 인간성은 점점 바래지고 피부로 느끼는 삶의 체감온도는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악’은 테러나 전쟁,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자들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은 평범한 이웃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간파하였듯이 ‘생각’하지 않는, 생각을 거부하는 개인은 쉽게 악에 편승하고 개인의 안위를 추구한다. 국가나 기업, 대학교 등 자신이 속한 조직의 권력이나 자본에 밀착되어 자기 판단을 포기하고 전문가로서의 특기, 기능을 팔아 먹고사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 세상이다. 막강한 자본주의 경제 논리에 기계적으로 반사하는 개인들이 사는 시대, 스스로 그렇게 조직에 충성을 다하는 나치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전체주의 시대다. 


3.시대고독#1,캔버스에 아크릴, 27.3×22m, 2018_800.jpg

시대고독#1_캔버스에 아크릴_27.3×22cm_2018


4.시선의 경제학-무수한 타인의 얼굴로 살아가기, 캔버스에 아크릴, 90.9×72.7cm, 2018_800.jpg

시선의 경제학-무수한 타인의 얼굴로 살아가기_캔버스에 아크릴_90.9×72.7cm_2018


  그렇다면 이러한 개인들이 사는 시대에서는 국경이 없는 기억의 연대 - 저항의 연대는 불가능한 것인가? 기억/저항의 연대를 통해 자본의 전체주의화에 의해 파괴된 아프리카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시리아 등 그 외의 지역에서 발발하고 있는 잔혹한 살상에 대해 저항의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것인가? 마치 ‘오늘’만 있는 것처럼 사는 개인들에게 역사를 기억하라고, 진실과 마주하라고 외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공허한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홀로코스트’를 ‘오늘’의 무대 위로 재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계 많은 예술가들이 환경운동과 반전을 주제로 작업하며, 끊임없이 망각에 저항하여 볼 수 있게 만들려는 노력은 깨어있을 한 사람이라도 만나고자 함이다. 지구의 환경을 위해 행동하고 추악한 전쟁을 고발하고 가난과 기아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 결코 나 아닌 타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전쟁과 환경파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돼 있다. 세계 소비주의 권력시대를 살아가기에 그러하다. 우리가 난민을 끌어안고 우리의 자리를 나눠야 하는 이유 또한 그러하다. 


5.인간, 어둠 속으로의 후퇴, 캔버스에 아크릴, 116.8×91cm, 2018_800.jpg

인간, 어둠 속으로의 후퇴_캔버스에 아크릴_116.8×91cm_2018


6.죽음의 푸가-우리는 구름 속에 무덤을 만든다, 캔버스에 목탄, 콘테, 145.5×112.1cm, 2018_800.jpg

죽음의 푸가-우리는 구름 속에 무덤을 만든다_캔버스에 목탄, 콘테_145.5×112.1cm_2018



  내가 택한 망각에 저항하는 방식은 전시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어둠만 무성하고 ‘희망’은 보이지 않는 나의 작업에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루쉰의 말처럼, 희망이란 본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땅에 난 길처럼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긴 것이다.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생겨난 종전이라는 통일이라는 희망을 얻기까지 우리는 어두운 시간의 터널을 지나왔다. 어느 나라 못지않게 전쟁의 상흔이 많은 나라이다. 그래서 더 ‘기억’의 문제를, 기억의 연대 가능성을 작업을 통해 질문하고 망각에 저항하고자 한다. 촛불혁명이 없었다면 여전히 ‘밤과 안개’ 속에서 길을 찾고 있었을 우리에게 ‘기억의 연대’는 시대적 당위라 할 것이며, 이러한 시대의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은 ‘보는 이’에게 끊임없이 ‘질문과 생각’을 전시하는 것이다.

●강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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