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는 계산기다. 그리고 계산은, 아직 나는 모르는, 하지만 이미 정해져있는 답을 알아내기 위한 기계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동전으로 복권의 은박을 긁어내는 과정과 비슷하다. 은박 아래 가려진 글자가 ‘꽝'이든 ‘당첨'이든 이미 정해진 운명의 결과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복권의 은박을 더 잘 벗겨내는 방법같은 것은 없다. 어떻게 긁어도 같은 복권은 언제나 같은 글자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정해져있다고 해도 그 결과를 알게되는 과정에서의 긴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산의 실행과정을 잘 설계하면 그 긴장을 지속시킬수 있다. 그 때부터 컴퓨터는 더 이상 계산기가 아닌 게임기라고 불린다.
김명진_ubundum plan_game, multi media_installation_2019
김현철_Leaver_video game_installation_2019
이 전시에서 열 한명의 작가들은 비디오 게임이란 형식하에 다양한 미디어 작품들을 선보인다. 결과적으로 작품형식에의 제약은 여러 흥미로운 효과들로 이어진듯 보인다. 특히 컴퓨터를 사용한 인터랙티브 아트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열린 현상을 추구함으로써 “컴퓨터는 결정론적 계산기계"라는 사실과 끊임없는 모순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이 전시의 작품들은 스스로를 게임으로 규정하는 대신 정해진 계산출력으로 이르는 과정의 현상학적 긴장상태를 유지하는데 보다 집중하고 있다.
유 능_노동재미_game, multi media_installation_2019
최영경_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_video game, multi media_installation_2019
개념미술의 틀에서 작가들이 컴퓨터 기반 인터랙티브 작업을 시도할때에는, 작품이 갖는 정적개념의 비언어적 표현을 위해 비교적 짧은 시간단위에서 알고리즘의 실행 단위들을 가능한한 다양한 시공간적 양상으로 배치해야하는데 이는 반복과 추상에 적합하고 결정론적인 컴퓨터 언어의 특성으로 인해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어렵다. 이 때 작가들은 보통 무작위 함수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거나, 예측 불가능한 물리적 과정을 작품내에 포함시키거나 (이중 진자, 충돌, 부서짐, 연기, 물, 시뮬레이션 등) 관객으로부터의 입력을 작품의 변주를 위한 주된 소스로서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인터랙티브 아트 특유의 수동적인 관객 경험으로 이어질 위험을 항상 내포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작가들의 선택은 결정론적 코드가 출력하는 현상이 비결정론적 양상을 보일때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기보다는, 작가가 의도한 개념의 최소 요소들을 작품내에 성기게 배치하고 그 사이의 빈 시공간을 어떤 무작위성으로 채우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김성현x최종윤_Slice Ninja_video game_installation_2019
이유진x편재훈_Don’t Poo me_video game, multi media_installation_2019
하지만 게임이라는 작품형식에의 제한하에서 작가들이 의도한 개념은 게임의 룰과 목적으로 치환될 수 있어 현상학적 경험을 위한 구현(컴퓨터 코드)과, 개념의 전달을 위한 구현(게임의 룰)이 분리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분리로부터, 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은 작업의 개념과 작업의 현상이 서로 공진화해나가는 과정을 공통적으로 경험하였다.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의 정보이론적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자면, 게임이라는 형식을 통해 작품이 출력하는 현상은 잡음으로, 그리고 게임의 룰과 목적은 작품의 메세지로서 비로소 명확히 구분되어 설계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같은 관점에서, 게임이 아닌 형식을 가진 인터랙티브 아트들은 어쩌면 잡음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려고하는 이율배반적 목적을 지닌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