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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April Fools' Day. Anybody have any good pranks?_리넨에 유채_194×259cm_2019



죽은 소의 젖을 짜는 아이  

영상이미지와 화가 

사건의 전후를 뒤바꾸고 시간의 순서를 만화의 컷처럼 상상하는 미국의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비디오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를 탐닉했다. 조성훈 작가 또한 부모님이 운영하던 비디오가게에서 성장하였다. 만화방 집 아이처럼 비디오가게의 아이는 이미지의 만신전에서 자라는 것이다. 영화 속 현실과 일상의 현실이 같다. 어린 시절 작가는 자신이 신이 아닐까 또는 외계인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세상이 작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강렬한 감정에 도취되곤 했다. 

 수많은 영화를 보고 싶은 부분만 볼 수 있었던 작가의 경험은 자신의 현실 또한 스킵하고 편집해서 보는데 거부감이 없다. 작가는 영화감독의 눈을 차용한다. 따라서 작가의 드로잉은 비디오키즈의 영화적 상상력과 경험에서 나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우리도 정도 차이는 있으나 이미지의 젖을 먹고 자랐으니 말이다. 사실 수많은 작가들은 미술관과 박물관, 고전미술과 현대미술 이상으로 영화와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와 광고와 드라마를 보며 성장한다. 영상시대의 화가들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는가? 사진 발명 이전의 풍경화와 사진 발명 후의 풍경화는 다르다. 사진이라는 기계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계의 풍경이 다르듯 영화를 통해 바라본 인간과 세계는 다르다. 조성훈 작가의 작품들, 그의 이미지들은 이러한 성장환경과 변화된 세계, 그리고 눈과 의식의 변화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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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ing_종이에 수채_70×50cm_2019

회화에서 이미지는 일종의 실재(Reality)와 연결된 지표(index)에 가깝다. 고양이의 꼬리를 보거나 개의 꼬리를 보고 고양이와 개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 유비적 관계가 아니라 실제 존재론적 가치 또는 실재성을 아주 조금이라도 담고 있는 이미지로 수용된다. 제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수용자는 자신의 의식과 경험을 투사해 이미지를 하나의 현실로 해석한다. 또한 회화이미지가 일상공간이 아닌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같은 비일상의 공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예술작품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미적 생산과 매개와 수용의 관계는 비가역적이며 부조리하거나 불일치한 것이 대부분이다. 작가의 경험과 상상, 작가의 통찰은 전시장에 놓이는 순간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니게 된다. 발신자의 메시지는 결코 수신자를 찾지 못한다. 회화의 세계에서 하나의 의미로 수렴하는 메시지는 발신자와 매개자, 수신자의 존재론적 불일치에 의해 다수의 의미로 분열된다.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작품에 매료되는 것을 넘어서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부조리하며 고독한지 깨닫게 한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미학적으로 아름다우며 경제적으로 부가가치가 높다하더라도 나의 존재라는 문제와 만나면 하나의 계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이란 시간 속에 곧 망각될 사건과도 같은 것이다. 하물며 비물질성인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그것을 의미론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계량화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를. 이런 점에서 조성훈 작가가 일관되게 반복적으로 '공허함'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왜 공허함이 느껴질까? 공허를 느끼는 장소는 어디인가? 두뇌나 심장과 같은 장기인가? 마음, 정신, 의식, 영혼 어디인가? 빈 여백이 많다고 공허한 것은 아니다.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공허의 원인은 같을 수 없다. 사람마다 공허의 실체가 다르다. 실상과 허상의 관계 속에서 솟는 공허함이다. 조성훈 작가는 공허가 솟는 장소와 시간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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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ing_종이에 수채_70×50cm_2019


공허의 무한연쇄 

작가는 이 '공허감'의 문제에 몰입해 작가 자신의 일상과 세속적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엿본다. 다차원의 세계가 중첩된 특별한 공간이 있다. 마치 에셔(Escher, Maurits Cornelius)의 에칭처럼 꼬리가 머리가 되고 다시 머리가 꼬리가 되며 날개가 되고 다리가 되고 입이 항문이 되고 항문이 입이 된다. 포유류가 파충류가 되고 새가 물고기가 된다. 계단을 걸어 오르면 아래로 내려가거나 내려가면 올라간다. 큰 광장처럼 사방팔방으로 연결된. 이 세계는 수많은 신비로 가득하다. 사람은 짐승이 되기도 하고 신이 되기도 하며 돌이나 공기 같은 무생물이 될 수도 있다.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많은 영화를 본 의식(意識)은 깨져버리고 절단된 프레임과 시퀀스, 앞뒤를 잘라버리고 뒤죽박죽 미쳐버린 이야기와 사건들이 두서없이 혼종 된다. 꿈과 상상 속에 펼쳐지는 사건과 사물과 이미지들의 이종교배 되어 버린다. 배설하듯 또는 일기나 고해성사처럼 매일매일 반복해서 기록하는 작은 드로잉들은 마치 작가의 심리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들은 미래가 없는 우울한 단상처럼 표현된다. 수 백 장의 드로잉은 현실의 대상이건 상상 속 대상이건 예외 없이 우울하고 부조리한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쉼 없이 순간을 기록으로 남긴다. 이 기록은 한편의 영화를 구성하는 찰나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찰나의 순간이 모이며 세계가 되고 일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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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oaded_캔버스에 유채_50×70cm_2019

그림 속 형상들은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메시지는 분명치 않다. 최초의 만물이 소통하던 신의 언어를 상실한 바벨탑의 해체의 순간과 다르지 않다. 신의 시간에서 보면 바벨탑의 사건은 불과 몇 초전에 벌어진 사건이다. 존재의 차원에서 인간의 메시지란 매번 틀리거나 모호할 뿐이다. 만일 인간이 신의 언어를 마주한다면 죽어버리거나 미쳐버릴 것이다. 마치 영화 인디애나존스 속에서 고도로 발달된 우주인의 지식을 머리에 구겨 넣은 악당처럼 말이다. 우리가 다룰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의미란 실재(Reality)의 아주 작은 단편일 뿐이다. 실상과 허상이 엉켜있는 이미지만이 인간에게 허락된다. 작가가 말하는 '공허함'이란 실상이란 허상의 엉킴이며 그러한 엉킴의 무한연쇄일 뿐이다. 무의미가 중첩되고 반복되며 무의미들이 마치 사물처럼 접속하고 절단된다. 공허의 순간은 그 연결되고 분리되는 결절점에서 등장한다. 

 '공허'란 단어는 거꾸로 뭔가 채워져 있는 것을 동반한다. 며칠간 밥을 굶어 속이 비면 뭔가 먹고 채워야 한다. 공허란 정신적 또는 정서적 굶주림만큼이나 신체적 또는 물질적 굶주림을 떠올린다. 카프카의 굶는 광대처럼 너무나 고통스런 공복감을 하나의 기예로 승화시킨 사람마저 출현한다. 카프카는 사라져버리기 또는 망각되기를 욕망하곤 했다. 마치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의 역설처럼 결코 자연인이 될 수 없는 인간이 다시 카메라의 눈과 마주해 익명의 수많은 시청자들과 관계를 맺어야하는 운명처럼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욕망 말이다. 비우고 채우는 인간의 신체는 '공허'와 '충만' 사이를 왕복한다. 인류의 역사는 공허함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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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oaded_캔버스에 유채_70×50cm_2019

죽은 소의 젖을 짜는 아이

이미지에는 겉과 속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이는 어떠한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겉이 속으로 삼투하고 속이 겉으로 미끄러진다. 조성훈 작가의 경우처럼 어린 시절부터 영상이미지의 깊고 넓은 세계에 흠뻑 젖어 살아온 사람은 이미지가 곧 숨 쉬는 공기이자 물이며 밥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건들, 이야기들, 드라마들이 현실(Reality)을 대신한다. 사진과 영화가 발명되고 문화산업이 되어 일상이 되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현실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작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것을 체득했다. 그의 회화는 그러므로 영화의 다른 얼굴이다. 이미지는 영화의 스틸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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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감드로잉_캔버스에 유채_38.8×54cm_2016

이번 전시의 대표작은 한 소년이 죽은 소의 젖을 짜고 있고 다른 한 소년은 우울한 표정의 소녀를 위로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날카로운 나무막대가 위를 향해 꽂혀 있는데 마치 샤먼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수, 솟대를 떠올린다. 또는 무중력의 우주공간에 올린 우주선 같기도 하다. 실제 그림에는 장난감 같은 작은 비행접시가 그려져 있다. 다른 작품은 공룡의 가면을 쓴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인과관계를 읽을 수 없는 별개의 사건과 이미지가 한 씬(시퀀스)으로 연출되어 있다.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얼굴을 가리고 등장한다. 결코 자신의 본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작가의 인물들은 영화 '조커'가 비극적 운명을 웃는 얼굴로 살아야 하는 인물의 영웅적 신화를 만든 것처럼 신화화된다. 사적인 작가의 세계에서 솟는 공허란, 인간의 비극적 운명, 냉혹한 시장논리, 질병과 전쟁, 착취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자란다. 영화보다 실제 현실이 더 지독하고 끈적하다. 

우리의 일상이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걸쳐 있기에 언제나 매개된 현실이고 재구성되고 번역된 현실이다. 현실은 마치 중국 전통기예인 변검(变脸)의 마스터가 수많은 가면을 순식간에 갈아치우며 변신하는 얼굴(페르소나)처럼. 어떤 얼굴이 진짜 얼굴인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너무 많이 또 너무 자주 가면을 갈아 쓰는 변검의 마스터 또한 자기 자신의 얼굴이 가면인지 아닌지 혼돈에 빠진다. 너무 많은 얼굴은 얼굴이 없는 것과 같다. 너무 많은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양육한 이미지를 이제는 아무리 쥐어짜도 나오는 것은 생명을 양육하는 젖이 아닌 우리 존재의 무게, 공기나 유령 같은 텅 빈 것뿐이다. 

 김노암